가정, 직장, 취미, 어떤 분야든 최고의 파트너를 만나면 삶은 몇 배로 즐거워진다. 하지만 공짜는 없다. 최고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상대의 마음부터 얻어야 한다.


누구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 뛰어나 350년간 세계 최고 부자를 지킨 가문이 있다.

산골마을의 농장주에서 시작해, 세상에 엄청난 역사적 기록을 남긴 이 가문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새로운 시대를 태동시켰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같은 천재 화가를 최고의 예술가로 길러냈고, 갈릴레이 갈릴레오 Galilei Galileo를 후원해 천문학 발전을 가져왔다. 도대체 어떻게?




1) 무엇보다 의리와 신용부터 보여주자


15세기 초반, 실질적으로 메디치 가문을 일으킨 은행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Giovanni di bicci de' Medici'. 그는 당시 후발주자였던 메디치 은행의 로마 점장으로 시작해 은퇴하는 삼촌의 뒤를 이어 직원 17명의 은행을 인계받는다.


이때 본점을 피렌체로 옮기게 되는데, 역사는 거기서 시작된다.

메디치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후 8년간 거래를 지속한 추기경 코사. 이후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며 소규모 은행 메디치는 갑자기 교황의 주거래 은행으로 바뀌게 된다.


조반니 디 비치는 모든 게 잘 돌아가는 듯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이 폐위되어 체포되고 거액의 벌금을 물기에 이른다. 최대 고객이 빚까지 떠안고 몰락하게 된 이 상황에, 조반니 디 비치는 폐위당해 감옥에 갇힌 교황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주며 끝까지 돌봤고, 임종 후에는 화려한 묘지까지 마련해준다.


당시 은행업에서 가장 중요했던 비즈니스 가치는 바로, '의리와 신용'이었다. 이들은 그 사례로 '한번 거래한 고객은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줬던 것이다. 물론 메디치 은행 역시 큰 타격을 받았지만,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마르티누스 5세는 메디치 은행을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으로 지명했고, 그때부터 업계 1위 은행으로 올라선다.


2) 아끼지 말고 전폭적으로 지지하자


평범한 피렌체 소년 미켈란젤로를 위대한 화가로 만든 건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Lorenzo de' Medici였다. 우연히 '산 마르코 수도원' 근처에 있던 메디치 정원을 산책하다가, 조각 연습을 하고 있던 한 소년을 만난다.


그날 소년 미켈란젤로는 사냥과 목축의 신 '파우누스'의 두상을 연습 삼아 조각하고 있었는데, 늙은 파우누스의 얼굴 치고는 가지런히 뻗은 흰색 치아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로렌초는 소년에게 다가가 '늙은 할아버지 이빨 치고는 너무 가지런하지 않니?'라고 말했다.


다음날 같은 장소를 산책하던 로렌초는 어제 만난 소년이 조각해놓은 늙은 파우누스의 완벽한 조각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해, 곧바로 그 소년을 메디치의 양자로 입양한다. 그때부터 미켈란젤로는 웅장한 메디치 저택에서 생활하며,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들에게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배우고 철학자들로부터 플라톤 철학과 미학을 배우게 된다.

이후 르네상스 예술은 미켈란젤로에 의해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발전한다.



3) 틈틈이 끊임없이 새로운 대화를 하자


코시모 데 메디치 Cosimo de' Medici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생각의 틀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공부를 하던 중,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차이에 대하여'라는 강연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그때부터 플라톤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어 플라톤 아카데미를 세우고, 틈나는 대로 그곳을 방문해 사람들과 철학적 토론을 하게 된다.


당시 전 유럽으로 확장되던 메디치 은행을 경영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코시모. 집무실에는 늘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사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음에도, 틈만 나면 아카데미로 찾아가 책 읽고 함께 토론하며 밤을 지새우기 다반사였다.


팍팍한 삶에 '무엇이 나를 가장 큰 행복으로 이끌어줄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토론을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직관과 통찰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단순히 일상적 대화가 아닌,

'공부하고 토론하며 새로운 생각을 교환하는 행위가 영원히 지혜롭게 사는 방식을 가르쳐준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실천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일 때 이 방법은 힘을 가진다.

메디치 가문 역시 그들이 누린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 모두,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지 목적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 세상을 누군가와 함께

즐겁게 살아가겠다는

'인간적 목적'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김상근 저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지식을 말하다>를 참고


벤저민 프랭클린이 제작한 '유리 하모니카'는 그때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던 새롭고 신비한 음악을 표현했지만, 지금은 역사 속에서 잊힌 악기로 남아있다.


그런데 이 악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프랭클린의 악기 이름 앞에 이상한 수식어를 붙였는데, '저주받은 유리 하모니카'로 불렸던 것. 왜 저주받은 악기로 알려졌을까?



벤저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

(1706.1.17 ~ 1790.4.17)

미국의 정치가, 외교관, 과학자, 저술가, 신문사 경영자, 교육문화활동가


보스턴 출생. 필명 Richard Saunders. 아버지가 경영하는 양초와 비누 가게 견습공으로 일하다가, 형이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뉴잉글랜드 커런트 New England Courant>紙 발행을 도왔다.  

 

1729년 <펜실베이니아 가제트 Pennsylvania Gazette>지의 경영자가 되었고, 편집까지도 담당하며 유명한 신문으로 발전시켰다.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전신인 필라델피아 아카데미의 창설, 도서관 설립, 미국 철학협회 창립 등 폭넓은 교육문화 활동에도 전념했다.


자연과학에서도 지진의 원인을 연구해서 발표하는가 하면, 열효율이 높은 ‘프랭클린 난로’라든가, 사다리 의자, 다초점 안경, 피뢰침 같은 지금도 유용하게 쓰이는 수많은 물건들을 발명했고, 질병, 곤충, 해류, 인구, 전기, 태양의 흑점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1752년 연(鳶)을 이용한 실험을 통해 번개와 전기의 방전은 동일한 것이라는 가설을 증명했고, 전기유기체설(電氣有機體說 Electric Fluid Theory)을 제창했다. 

 

1753년 영국의 로열 소사이어티(Royal Society) 회원으로 선정되고, 코플리상(賞)을 받았다. 그해 전(全) 식민지 체신장관 대리가 되어 우편제도를 개선했고, 1754년 올버니 회의에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참석, 최초의 식민지연합안을 제안하였다. 1757년 펜실베이니아를 위해 영국에 파견되어, 식민지의 자주과세권을 확보하고 귀국하였다.  

 

1764년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인지조례(印紙條例)의 철폐를 성공시켰다. 1775년 귀국하여 제2회 대륙회의의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뽑혔고, 1776년 독립선언 기초위원에 임명되었다. 그해 프랑스로 건너가 아메리카-프랑스 동맹을 성립시키고, 프랑스의 재정원조를 얻는 데 성공했다. 1783년 파리조약의 미국 대표 중 한 명이었다. 

 

1785년 펜실베이니아 행정위원회 위원장이 되었고, 1787년 헌법회의에는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참석하였는데, 각 주 사이(특히 큰 주와 작은 주 사이)의 이익 대립을 조정, 헌법제정에 진력하였으며 새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 사망했다. 그는 평생 동안 자유를 사랑하고 과학을 존중했으며, 공리주의(功利主義)에 투철한 전형적인 미국인으로 일컬어진다.  

 

저서 중에서 상식철학과 뛰어난 기지와 경구가 넘치는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 Poor Richard's Almanac>은 많은 사람들에게 애독되었다. '한 푼을 저축해야 한 푼이라도 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같은 유명한 경구들도 이 책에서 나온 것이다. 사후에 출판된 <자서전 Autobiography>은 미국 산문문학 중 일품으로 꼽힌다.


악기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유리를 문질러 음을 만드는 것은 과거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이어져 왔으며, 유리에 물을 넣어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다양한 음색으로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다.


이런 종류의 악기는 'idiophone'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더 친숙하게 알려져 있다. 자체 진동을 이용해 소리를 내기 때문에 '크리스털폰'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아주 아름다운 천상의 음을 만들어 낸다고 했다. 이런 음악은 1740년대부터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아일랜드의 Richard Pockrich는 유리잔으로 연주하는 음악가로 유명했다. 1761년 유리잔으로 연주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을 때, 벤저민 프랭클린은 더 정교하면서 쉬운 유리 악기를 개발하려고 열을 올렸다.


그는 Charles James라는 작업자의 도움으로 피아노 건반과 비슷한 모양의 특별한 유리 악기를 개발하게 된다. 37개의 유리그릇을 테이블 위에 배열하여 색으로 구분되는데, 회전하는 방식으로 음을 만들어 냈다. 10개의 유리병이 동시에 연주될 수 있었으며, 기존의 유리 악기보다 쉽고 더 정확했다.


새로 만든 악기의 이름을 Glassychord라고 불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유리 하모니카'로 바뀌게 된다. 이 악기의 최대 장점은 바로 음색이 어떤 다른 악기보다도 달콤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손가락의 강하고 약한 압력에 의해 음색이 부드러워지기도 했고 강하게 변하기도 했다.


이 악기는 1762년부터 세상에 나타나 독특한 디자인과 오묘한 소리로 빠르게 인기를 얻었고, 사람들에게 매우 유명해졌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훔친 아름다운 소리의 이면에는 무서운 이야기도 있다.


음악을 듣다가 어지럼증과 메스꺼움을 느끼거나 졸도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심각한 경우에는 우울증에 걸리거나 귀신을 보는 괴현상까지 경험하게 된다고 했다. 장시간 음악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악기는 자살 충동을 일으키거나 정신병에 걸리게 만드는 '저주받은 악기'로 불리게 된다.

독일의 음악학자 Friedrich Rochlitz는 악기를 장시간 연주하지 않도록 경고했다고 한다.

'유리 하모니카'의 아름다운 음색 속에는 어떤 비밀이 있었던 것일까?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리 하모니카에 저주가 내렸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어떤 이들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의도적으로 제작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의도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구체적인 이론도 존재한다고 한다.


문제는 바로, 악기의 소리가 인간의 청력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유리 하모니카의 특정 주파수는 1KHz에서 4KHz 범위에서 나타나며, 이 주파수가 인간의 귀와 두뇌에 영향을 주어 이상 현상을 만들어낸다는 이론이었다.


일각에서는 악기에 사용된 유리에 납이 함유되어 있어 사람들에게 납 중독을 일으킨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납 중독은 18세기와 19세기에는 일반적이었고, 두통과 과민반응 그리고 발작 같은 증상과 함께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던 증상이었다.


악기를 가까이 두고 있던 사람들에게 나타난 이상 현상들이 납 중독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소문에 대한 진실이 무엇이든, 저주받은 악기에 대한 이야기로 인해 1800년대 초 유리 하모니카의 인기는 급격히 사라지고 말았다 한다.


그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이유 중에는 저주 이야기뿐만 아니라, 제작에 사용된 유리가 약하거나, 당시 유행했던 콘서트홀 전체에 울려 퍼지기에는 충분치 않던 소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점차 사라져 버렸다는 주장도 있다.


현재 이 악기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소장하고 있거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762년 세상에 처음으로 나타나 수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던 Glassychord, 과연 이 악기에 감춰진 어두운 수수께끼는 무엇일까?


출처 : <Amazing Story> <Peter Wa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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