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돈을 버는 이유는 무엇일까?

먹고 살기 위해서 그리고 미래를 위해 저축해놓는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겁니다. 맞습니다.

돈이 있어야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고, 이성을 만나 데이트도 하고, 자식 교육에 힘쓸 수 있고, 부모에게 효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돈 걱정 없을 정도로 충분한 부를 쌓은 사람들 역시, 돈을 더 벌기 위해서 투자에 힘쓰고 사업에 매진합니다. 왜 그럴까요?

부를 쟁취하고자 하는 인간의 동기는 유명한 경제학 고전 <유한계급론>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소스타인 베블런 Thorstein Veblen의 <유한계급론>은 부 그리고 부자에 대한 감춰진 속사정을 다룬 책으로, 1899년 미국 서점가를 강타했습니다.

그는 제도학파라는 새로운 경제학파를 창시한 사람인데, 행동심리학, 실용주의, 진화론 등을 경제학에 접목시켜 기존의 아담 스미스 고전파 경제학을 비판합니다.


그는 유한계급론을 통해 유명인사가 되긴 했지만, 그의 팩트폭력에 불편해했던 많은 세력들로부터 견제를 받았고, 괴팍한 성격인 그는 거의 잊혀진 존재로 시골 오두막집에서 초라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종래의 경제이론에서 부를 얻고자 하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생존 또는 편안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쌀을 사기 위해서, 자동차를 사기 위해서, 자식 교육을 위해서 등 궁극적으로 소비를 위해 즉, 돈을 쓰기 위해서 부를 축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블런은 부 그 자체를 위해서 부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부는 사람들의 선망과 부러움을 사는 명예의 표시이기에 부를 축적하려고 한다는 것이죠.

물론 노동에 종사하면서 생계기반도 불안하고 모아놓은 재산도 없는 계층이라면, 당장 먹고 살기 위해 또 미래를 대비해 돈을 모읍니다.


최초의 사회는 평화로운 미개한 공동체였습니다. 이 사회에선 사유재산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남의 것을 빼앗는다는 개념조차 없었지요. 일을 잘하거나 효율적인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러다 인류는 약탈사회로 이행합니다.

타 부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일을 잘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해졌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측이 약탈품을 전리품으로 보유하면서 재산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전리품으로 여성을 데려오기도 하고, 여성들이 만든 생산물품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전리품이 많으면 그만큼 전쟁에서 승리한 경험이 많은 사람으로 인정했고 명예를 얻었습니다.


인류는 진화했고, 약탈활동은 생산활동에 다시 자리를 내줍니다.

힘으로 타인의 것을 빼앗아 재산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물건을 만들어 시장에서 거래하면서 재산을 형성합니다.


축적된 금전이 ‘약탈에 따른 전리품’을 대신해 우월함과 성공을 대표하는 상징이 됩니다. 산업이 성장하면서 금전은 명성과 존경을 부르고, 상대적인 중요성과 효력을 획득합니다.

부는 성공의 증거로서 최애템으로 인정됩니다.



한 개인이 정신적 안정감을 얻으려면, 그와 친숙한 주변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재화를 가져야 합니다.

능력 없는 의사가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보다 돈을 훨씬 잘 버는데도 불구하고, 의사들 사이에서 돈을 적게 번다는 사실은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불만을 가진 채 살게 합니다.


한편, 능력 있는 편의점 알바생은 그 능력을 인정받아 최저임금보다 20% 높은 시급을 적용 받고 있습니다. 그는 편의점 알바생 모임에 나가면 단연 연봉 1위입니다. 그는 기쁩니다.

타인과의 재산비교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은 자신의 불운을 탓하며, 만성적인 불만 속에 살아갑니다.


또 다른 한편, 사회에서 인정해주는 어느 정도의 재산을 축적한 사람들은, 더 격차를 벌리기 위해 끝없는 긴장에 시달리게 됩니다. 또한 부를 추구하는 욕망을 만족시킬 개인은 거의 없으며, 부가 아무리 광범위하게 혹은 평등하게 혹은 공정하게 분배되고, 또 사회 전체적인 부가 아무리 많이 증가하더라도,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을 결코 충족시키지는 못합니다.


본질 자체가 차별적인 비교에 바탕을 둔 명성을 위한 경쟁이기 때문에 최종 목표에 도달할 가능성은 결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베블런은 부를 축적하는 동기가, 단지 남보다 우월한 재력을 갖추어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려는 욕망이 전부인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가난에서 벗어나 안락과 안정을 추구하는 욕망도 돈을 모으는 하나의 이유이고, 돈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욕망도 하나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베블런은 우리가 돈을 버는 이유를 돈 그 자체가 명예와 부러움의 상징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서 돈을 버는 이유를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찾기 어렵죠. 타인보다 우월해지기 위해 돈을 번다는 생각이 사회적, 윤리적, 종교적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않게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스테디셀러로 100년이 넘게 읽히고 아직까지도 언급되는 것을 보면, 베블런의 통찰은 뼈를 때리는 레알 팩트폭력이 아닐까요?


소스타인 베블런 저 <유한계급론>를 참고




아담 스미스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경제의 원리가 그 나라의 부를 증대시킨다고 했던,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학자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상징으로 대접받는다.

 

아담 스미스는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잘 모른다. 조금 비틀어지고 그럴듯한 아래의 내용만 반복해서 들었을 뿐이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 술집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 덕분이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심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닌 그들의 이익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그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바탕으로 한 시장경제체제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모두에게 만족을 주고, 모든 이들의 부를 증대시킨다고 주장한다. 이기심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면서, 모두를 이롭게 하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급진적인 자본주의자들 혹은 각종 규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일부 세력들은 자신들의 이기심과 탐욕을 긍정하고 변호한다.

자신들의 탐욕이 모두를 이롭게 하고 있다면서, 내가 돈 버는데 방해 좀 하지 말라고 그 욕심을 정당화한다. 또 사회가 자신들의 탐욕을 방해한다면서, 아담 스미스를 인용해 자유경제를 주장한다.

 

그러나 시장의 원리를 말하기 전에 매우 중요한 전제가 하나 빠져있다.

우리는 국부론의 이기심보이지 않는 손만 보았지, 그가 말한 도덕철학과 정의는 배운 적이 없다그의 첫 번째 저서 <도덕감정론>에서 이야기하는 사회질서는 어떤 원리로 작동되는지 알아보자.

 

우리 사회는 나름대로 질서 있게 돌아간다.

아담 스미스는 무엇이 사회질서를 만드는지 고민했고, 그 원리는 인간의 감정에 근거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이기적이라 하더라도 그 천성이 타인에게 관심을 가진다. , 나는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반대로 타인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역지사지 해본 다음 타인의 감정과 행동의 타당성을 판단한다. 이를 공감 sympathy’이라 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타인도 나를 역지사지하고 나의 감정과 행동을 판단한다.

 

타인의 인정은 나를 기쁘게 하고, 부정은 나를 불쾌하게 한다. 당연히 나는 부정보다는 인정을 받기 원하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잇는 행위를 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타인이 아니기 때문에 타인의 마음을 알 수는 없다. 그래서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를 통해서 타인의 입장이 되어본다.




, 우리는 경험을 바탕으로 공평한 관찰자를 마음속에 만들고, 그 공평한 관찰자가 나의 행동이 옳았는지 잘못되었는지 판단함으로써, 우리의 행위를 스스로 평가하고 타인의 행동도 판단한다.

그러나 세상은 불확실함으로 가득 차있다. 좋은 마음으로 했던 행동의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고, 나쁜 마음으로 한 행동의 결과가 좋을 때도 있다.

 

한편 실제 세계에서는 결과만을 보고 칭찬하거나 비난이 주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를 통해 우리 스스로를 위로한다.

열심히 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 우리는 졌지만 잘 싸웠다고 위로하고, 부득이하게 불운이 닥쳤을 때는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위로한다.

 

우리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면서 묵묵하게 자기 길을 걷는 사람을 지혜롭다고 칭찬하지만, 타인의 평가에만 목을 메고 과정보다 결과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을 살고 있다.

이들은 자기 마음속의 공평한 관찰자를 무시하고, 결과에 기반한 타인들의 평가에만 집중한다.

 

아담 스미스의 도덕사상은 간단하다.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공감에 충실 하라는 것이다. 그는 제한 없는 이기심을 허용하지 않았다. 제한 없는 이기심은 공평한 관찰자의 공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노동운동을 보더라도 공평한 관찰자의 공감이 다르게 작용함을 느낀다.

1970년대 기계만도 못한 취급을 받던 재봉틀 공장 노동자들의 분노에는 공감하지만, 21세기 연봉 1억원의 귀족 노조들의 투쟁에는 공감하지 않는다.


인간은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판단을 일반적 규칙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고려하는 감각 곧 의무감 sense of duty’ 혹은 도덕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가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행위에 대해서는 법으로 처벌하도록 하고, 이를 정의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은 아담 스미스에 대해 이기심을 조장하는 최초의 경제학자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는 내면의 공평한 관찰자의 공감이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했고, 정의를 해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국가가 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개인의 무한한 이기심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 적은 없다.

 

먼저 정의와 도덕감이 전제된 이후에 시장경제를 논하는 것이 아담 스미스 사상의 핵심일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가 내 속에서 잘 작동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쫓지는 않는지, 나의 모든 행동이 양심껏 거리낌이 없는지 등,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가 정말 공평해지도록 타인의 입장을 이해해보는 습관, 그리고 삶을 다양한 경험으로 채우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BetterLife>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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