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샘 이야기는 몇 세기에 걸쳐 전해지지만, 아직도 그 샘을 찾아내지는 못했죠. 실제로 있긴 한 걸까요? 그리스의 작은 섬 사람들이 확신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들이 어떻게 우리보다 훨씬 더 오래 살게 되었는지 차근차근 알아보죠.


에게해의 253㎢ 면적, 그리스 이카리아섬.

이곳엔 8,500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다. 사람들은 이들이 영원한 젊음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원까진 아닐지라도 이카리아 인구 3분의 1이 90살 혹은 그 이상까지 살고 있고, 이들 대부분은 시간이 흘러도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비교하자면 미국의 평균 수명은 78세, 영국은 81세, 캐나다는 82세다.

그렇다면 비밀이 뭘까? 사실 그게 꽤 많다.




1) 건강한 식사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이들의 균형 잡힌 식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들은 절대 기름진 햄버거나 큰 밀크쉐이크를 주말 새벽 1시에 먹지 않는다.

이카리아는 외딴 곳에 위치한 섬이고, 줄곧 바다 상황도 별로 좋지 않아서 물자를 제대로 들여오지 못했다.


그 때문에 섬의 거주자들은 자신들의 작물로 자급자족을 하게 되었다. 이 패턴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지금도 이카리아 사람치고 일년 내내 재배가 가능한 자기 정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이들은 맛있는 음식을 위해 직접 식물과 채소를 재배하는 것을 진정으로 즐긴다.


이들의 식단은 주로 콩, 허브, 견과류 그리고 제철 과일과 채소들이다. 이처럼 항산화 성분으로 가득한 비가공식품들이 이들의 건강에 엄청난 효과를 가져다 주는 것으로 보인다.

음식의 살충제도 보존제도 없을 테니,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이카리아 사람들이 알츠하이머나 치매 같은 병에 거의 걸리지 않는 것도 당연하겠다.

사람들이 하는 ‘당신이 먹는 음식이 곧 자신이다’라는 말은 사실인 것 같다.


2) 공동체 의식

이 섬의 사람들은 확실히 공동체 중심적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 삶의 좌우명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다른 나라로부터 침략을 받아온 그들의 아픈 역사로부터 이어져온 것 같다. 힘든 시간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 의지하며 더 강해지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사는 곳이 아주 고립된 섬이라는 것도 강한 공동체 의식에 큰 몫을 했다.


물론 섬에 갇힌 건 아니고 비행기나 배를 타고 나갈 수 있다. 공항도 있다. 단지 대부분 사람들이 그 섬 안에 있는 것을 행복하게 즐기고 있을 뿐이다.

만약 여러분의 고향이 장수로 유명한 곳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부모 세대에서 자식으로 이어지는 대가족, 가까운 친구들과 친척들이 이 섬 안에서 도보 거리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정기적으로 만나며 강한 유대를 쌓게 된다.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요리를 하다 말고 재료를 빌리러 가는 건 여기서 아주 일상적인 일이다.



3) 활동적인 라이프스타일

이카리아는 돌길로 가득한데, 그래서 짧은 거리를 걷는 것도 많은 힘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이런 길을 다니며 자랐다면 그렇게 지치지도 않는다. 이곳 사람들은 걷기 운동을 아주 많이 한다.

교류가 활발한 이카리아 사회에서 사람들은 보통 걸어서 다른 이들의 집에 놀러 가곤 한다.


이런 활동적 라이프스타일은 건강한 몸무게를 유지하고, 심장과 혈관 건강을 최상으로 유지하도록 돕는다. 많은 나이가 되더라도 마찬가지다. 알다시피 비싼 헬스장 회원권이 중요한 게 아니다.


4) 시계가 없다

직업, 사회생활, 개인적인 일 사이에서 시간에 구애 받지 않는다고 느끼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카리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외부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들의 일상 생활은 시간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말하자면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고 늘 가능성을 열어두는 편이다.


친구가 와서 저녁을 같이 먹을 약속을 잡았다면, 시간이 됐다고 느낄 때 친구들이 오는 것이다. 절대 시계나 스케줄을 보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확인하지 않는다. 다들 흐르는 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5) 잦은 낮잠

시계가 없는 덕분에 이카리아 사람들은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를 더 기울인다. 만약 오후 중간에 낮잠을 자고 싶으면 그냥 잔다. 달콤한 낮잠 후 사람들은 늦은 저녁까지 더 쌩쌩해져서, 다음날 새벽까지 친구들과 어울리며 재미있는 일을 할 수 있다. 밤에는 잠을 자고 몸이 준비되었을 때 일어난다. 알람도 없고 스누즈 버튼도 없다.


6) 적은 스트레스

사람들에게 삶은 그저 빨리 돌아가는 쳇바퀴 그 자체이고 그게 우리 일상이다. 하지만 이카리아 사람들의 40%는 직업이 없다. 스트레스 받을 일처럼 들리는가?

사실은 이것 덕분에 이들이 걱정 없이 산다. 잉여 수입이 딱히 없어서 어떤 최신형을 살 것인지, 아니면 사치스러운 집의 대출금을 어떻게 갚을 것인지 그런 것에 대한 걱정도 없다. 가진 것에 만족하면서 검소하게 삶을 즐긴다.

업무, 신용카드 청구서, 월세, 이런 스트레스가 없으면 걱정할 게 뭐 있겠는가?


7)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

이카리아는 세계의 과학자들이 꼽은 5곳의 ‘블루존 Blue Zone’ 중 하나다. 블루존이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사는 특정 지역들을 뜻한다.

이탈리아의 사르데냐와 올리아스트라, 코스타리카의 니코야 반도, 일본의 오키나와 그리고 캘리포니아의 로마 린다 등의 지역들이 블루존에 속한다.


블루존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그들이 가족과 매우 친밀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노인들은 일상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지 집 안의 어르신 정도가 아니고, 조부모들은 그들의 손자들을 양육하는 것을 도와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족의 사업까지 운영한다.


8) 뒤끝이 없다

몇 년 전에 사이가 안 좋았던 사람들을 여전히 미워하고 있는가? 이런 부정적인 기운은 기분을 나쁘게 하고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에 사람을 정말 늙게 만든다.

해묵은 감정을 품는 건 새로운 것을 경험하지 못하게 막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카리아 사람들은 현재를 살며, 자신의 삶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개의치 않으려고 한다.


이 사람들은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서로에게 감사하며,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한다. 이렇게 살면 삶은 더 재미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유를 즐기며 스트레스를 덜 받으려고 노력한다. 놀랍게도 상담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단다.


9) 양약을 쓰지 않는다

두통이 있을 때 아스피린을 복용하고, 복통에는 핑크색 약을 삼키는가? 이카리아에서는 이런 종류의 약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서양 약 대신 이카리아 사람들은 천연 성분의 약과 가공하지 않은 재료로 몸을 치유한다.

이들은 주로 허브를 사용해서 베이거나 발진이 난 곳을 치료한다. 그리고 몸의 속도에 맞춰 치유되도록 내버려둔다.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이카리아 사람들의 습관 중 본 받고 싶은 것이 있는가?


<Bright Side Korea>를 참고




죽음, 세상에 이보다 무겁고

힘들고 어려운 주제가 있을까?

이것은 모두의 삶에서

결코 누구도 비켜갈 수 없다.

그렇기에 한 번쯤은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일이 필요하다.

- 유성호, 서울대 법의학과 교수 -


매주 월요일, 죽은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남자가 있다. 매주 시신을 보러 가는 남자.

대한민국에 그처럼 매주 시체를 만나는 사람은 단 40명.


심지어 그들은 1년에 두 번 모일 때도 절대 같은 차를 타지 않는다. 그들이 한꺼번에 사망하면, 대한민국에 시체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전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의학자 法醫學者 Medical Examiner’다.




사람의 몸에 남는 메시지


그가 시체를 보기 전에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38세 가정주부인데 자다가 죽은 것 같아요. 심장마비인 것 같아요.’

‘아기가 갑자기 사망했어요. 자는 줄 알았는데 깨질 않아요.’


하지만 시체를 보고 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심장은 사람이 죽으면 다 마비됩니다. 남편에게 맞아 외상성 쇼크로 사망한 것으로 보여요.”

“오른팔과 오른 손목 멍 자국으로 봐서 아이는 살아있을 때 이미 손상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38세 가정주부의 경우, 형사는 처음에 심장마비로 단정했다. 3일 전에 부부싸움을 하긴 했지만, 허벅지에 맞은 자국이 있어도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검 결과는 달랐다. 양쪽 허벅지의 지방층이 으깨져 있고 근육도 파열되었다.


그녀는 조직이 좌멸되면서 다른 장기에 영향을 미쳤고, 주부는 누워서 앓다가 사망했을 거라고 말했다.

그가 시체를 보기 전과 후, 과연 같은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타인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


내가 아닌 모두를 타인이라고 한다면, 과연 내가 타인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을까?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이라는 유명한 사건이 있었다.

한 남성이 술을 마시고 넘어져 머리 손상으로 보라매병원에 입원했는데, 뇌출혈이 심각한 상태임을 감지한 의사가 즉각 수술을 했다.


의사는 수술이 잘 되어 회복 확률이 높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내는 경제적 문제 때문에 무작정 퇴원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가족들의 거친 항의에 의사와 레지던트는 퇴원 서류에 사인을 했고, 남편은 집에 도착한 후 인공호흡기를 떼자 사망했다.


이후 검찰에서는 퇴원 서류에 사인한 것을 두고 살인죄로 기소를 했다.

의사와 아내 그리고 함께 사인했던 레지던트와 공기주머니를 짜면서 갔던 인턴까지 모두 함께였다. 결국 의사와 레지던트는 항소심에서도 살인방조죄로 유죄를 선고 받게 되고, 이후 이 사건은 의사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즉, 보호자가 아무리 요구해도 회생 가능성 있는 환자는 절대 퇴원시키지 않게 된 것이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타인이 아닌 나는 어떤가? 나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을까? 아니, 정말 죽고 싶은 걸까?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의 투신자살자들을 촬영해서 논란이 된 다큐멘터리가 있다.

<다리 The Bridge>라는 제목의 이 영상에서 감독은, 2004년 한 해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다리 주변에 설치한 카메라를 통해 23명 자살자의 투신 현장을 담아 보여준다.


이후 잡지 <뉴요커 The New Yorker>는 다리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했다가 다행히 구출되어 살아남은 사람들을 인터뷰했는데,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뛰어내린 순간, 인생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뛰어내리고 처음 떠오른 생각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였죠. 나는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서울대학병원 안용민 교수가 실제 자살 시도자를 진료하면서 들었다는 내용과 놀랍게도 일치한다.

그들은 모두 말한다. 죽음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해왔고, 자기가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해서 실제로 실행했는데, 막상 죽으려는 순간에는 살고 싶었다고 말이다.


유성호 저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지식을 말하다>를 참고


1800년대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체의 관점에서 자연을 설명했지만, 1970년대부터 현대 진화론은 유전자의 관점에서 자연을 설명한다.


‘주어진 환경에서 생존에 가장 적합한 특성을 가진 종이 생존한다!’라는 혁명적인 이론으로 자연에서 일어나는 많은 미스터리를 해결한 다윈은, 이 이론으로도 생물체의 행동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음을 깨달았다.


생물체는 도대체 왜 협동을 하는가!?

왜 그들은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서로를 돕는 것일까? 일례로 일벌들은 침입자가 나타나면 왜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 싸우고, 더 나아가 자신의 번식은 포기한 채 여왕벌의 알만 보살피며 여왕벌의 번식만을 도울까?


침입자에 맞서 희생하고 자식도 낳지 않으면 일벌들은 서로를 도와서 얻는 게 없지 않는가? 그들은 왜 내가 아닌 남을 돕는 것일까?

이 수수께끼를 연구하며 현대 진화생물학계는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는데, 그 해답이 바로 유전자에 있었다.

생물체는 유전자의 ‘탈 것’ 또는 ‘운반체’라는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들의 <이기적 유전자>.

왜 유전자를 이기적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감이 잡히는가?

생물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일벌의 희생적인 협력 행위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런 행위들이 쉽게 이해가 된다.


일벌의 자식은 일벌 유전자의 50%만을 공유하지만, 여왕벌이 낳은 자식 즉, 일벌 자매의 유전자는 자기 자신과 유전자를 75%나 공유한다. 유전자의 50%밖에 공유하지 않는 자식을 직접 낳는 것보다, 여왕벌의 자식을 기르는 것이 유전적으로 더 이득인 것이다!


우리 몸의 자가치유 능력은 엄청나게 효율적이다. 세월이 흘러가며 손상된 세포들을 치유해가며, 인간이라는 정밀한 기계를 끊임없이 재정비해 나간다. 이런 이유 덕분에 인간은 수십 년씩 오랜 기간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신체의 자가치유 능력은 정말 강력하고 효율적이어서, 이론적으로는 평생 자신을 치유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불로불사를 이룰 수 있지만, 우리 몸은 늙어 죽는 길을 택한다.

신체는 왜 죽어야만 하는가?

왜 수명에는 끝이 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우리 몸의 주인이 우리가 아닌 유전자이기 때문이다.




유전자의 입장에서 우리 몸은 유전자를 운반하는 운반체다. 생물체라는 운반체를 타고 유전자는 오랫동안 영생을 누린다. 내 유전자는 신체를 늙어 죽지 않게 하고 평생 내 몸에서만 살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너무 위험하다. 내가 다른 수컷과 싸우다 죽든, 포식자에게 잡아 먹히든, 익사하든, 굶어 죽든, ‘나’라는 연약한 몸뚱어리 하나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 투자하기에는 위험성이 너무 큰 것이다.


현명한 유전자는 분산투자로 위험성을 낮춰야 한다. 그래서 운반체인 생물체에겐 성인이 되어 유전자를 번식할 수 있을 정도의 에너지만 투자해 자식을 여럿 나을 수 있도록 유도한다. 유전자를 여기저기 다른 몸뚱어리에 뿌리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분산투자 방법이다.


불로불사는 운반체인 내 몸뚱어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 탄 유전자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성별에 따라 수명에서 차이가 날까? 인간뿐만이 아니다. 침팬지, 고릴라, 긴팔원숭이, 오랑우탄까지 모두 암컷이 수컷보다 더 오래 산다. 암컷, 수컷 모두 유전자 운반체라면, 암컷 운반체가 더 오래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해답은 암컷과 수컷의 서로 다른 번식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수컷 유전자와 암컷 유전자는 서로 다른 투자 전략을 취하고 있다. 우선 초기 투자부터가 다르다.

인간을 보면 남자는 365일 정자가 2억 마리씩 수도꼭지 튼 것처럼 콸콸 나오지만, 여성의 난자는 한 달에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또 난자와 정자가 어렵게 여성의 뱃속에서 수정되면, 여성은 장장 9개월에 걸쳐 뱃속의 아이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해야 하고, 그만큼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남자에 비해 처음부터 차이가 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오래 뱃속에서 키운 후 산부인과도 없는 숲에서 목숨 걸고 애를 낳아야 한다.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수개월에 걸쳐 젖을 먹이고, 걸어 다닐 때까지 업고 다니며 아이가 스스로 앞가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유리병 같은 아이에게 헤아릴 수 없는 노력과 시간을 들인다.


이렇게 뱃속에서 정자와 난자가 만난 순간부터 그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엄청난 노동과 생물학적 자산을 투자한 엄마는 자식을 대하는 마음마저 특별해진다. 엄마는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을 지키고 지키고 또 지켜낸다.


그렇다면 왜 여자가 남자보다 더 오래 사는 것일까?

여성은 50세가 넘어가면 폐경에 접어들고 번식을 할 수 없게 된다. 나이든 여성이 또다시 9개월간 임신을 하고 출산의 고통을 견디기에는 위험성이 너무 높은 것이다.


따라서 직접 자식을 낳는 것보다는 이미 낳아 놓은 자식이 또 자식을 낳을 수 있도록 돕고, 그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돌봐주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다. 할머니의 손자 손녀들은 할머니 유전자의 25%를 공유하고 있으니까.


그만큼 수컷은 번식 활동에 있어서 육체적 부담이 거의 없고 죽을 때까지 번식 능력을 고이 간직하다가 번식 능력이 떨어지면서 죽음에 이르지만, 번식 전략이 다른 여성들은 나이가 들면 직접 번식을 포기하고 손주들을 보살펴 자신의 유전자가 최대한 많이 생존할 수 있도록 끝까지 돕는다.


많은 투자가 들어간 자식을 지켜내고, 또 그 자식이 낳은 자식까지 보살피는 것이 여성이 유전자를 남기는 방법이다. 여성의 폐경 시기가 자식 세대의 번식 시기와 비슷하다는 사실과, 그들의 수명은 손자 손녀가 성인이 되는 시기와 비슷하다는 사실은 아마도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유전자의 입장에서 여성의 수명은 더욱 늘어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오래 살며 끝까지 해야 할 임무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유전자에게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는 건 아니다.

현재도 수렵채집 생활을 하고 있는 부족을 보면,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는 아버지와 함께 자란 아이보다 키나 골격이 왜소했고, 아버지는 외부 침입자로부터 가정을 지켜내는 역할을 했으며, 사냥으로 영양소가 풍부한 고기를 구해오는 일도 아버지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아들이 성장해 성인이 되고 나면 상당 부분 대체 가능한 일이었고, 꼭 사냥을 하지 않아도 채식으로 생계유지를 하거나 다른 남성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인생은 얼마나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인 모양이다.


출처 : <1분과학>




그 동안 소실되었다고 여겨졌던 400년 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직접 쓴,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편지 원본이 최근 발견된 것을 살펴보자.


2018년 9월 21일 세계적인 저널 네이처 (Nature, The International Weekly Journal of Science)의 뉴스란에는 황당하면서도 과학 역사가들에게 놀랄만한 기사 한 편이 실렸다. 기사의 리드는,

Discovery of Galileo’s long-lost letter shows he edited his heretical ideas to fool the Inquisition


이탈리아 베르가모 대학의 과학 역사학자 살바토레 리치아르도 Salvatore Ricciardo 박사가, 다른 곳도 아닌 이름만으로도 겁나 유명한 ‘영국왕립학회’ 도서관에서 1616년 갈릴레이에 대한 첫 종교재판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단서였던 1613년 12월 21일 <카스텔리에게 보내는 편지> 원본을 발견했다.


그가 이 편지를 발견한 과정은,

① 갈릴레이의 서한을 받은 사람들의 추가적인 코멘트를 연구하고 있었다.

② 영국왕립학회의 온라인 카테고리 검색에서 ‘카스텔리’를 검색했다.

③ 뜬금없이 1613년 10월 21일로 표기된 갈릴레이의 편지를 발견했다.

④ 12월 21일에 작성된 그의 편지였고, 아래에는 정확히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약자 서명 G.G.가 있었다.


심지어 이 원본 편지는 1840년 왕립학회 카탈로그에서도 1613년이 아닌 1618년으로 분류된 사실을 보면, 찾지 못한 역사적 기록들이 아직 더 많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이 카스텔리에게 보낸 갈릴레이의 편지가 왜 역사적으로 중요했던 것일까?

이야기는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으로 종신형을 선고 받았던 1633년보다 20년 이전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609년 당시 파도바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이 발명됐다는 얘기를 풍문으로 듣고는, 그 망원경보다 훨씬 배율이 높아서 달까지도 자세히 볼 수 있는 ‘최신 망원경’을 제작했다.

덕분에 그는 달이 완벽한 구체라는 주변의 잘못된 인식을 깨고, 실제 달의 울퉁불퉁한 모습을 소상히 밝혀내게 되었다.


너무 신이 났던 갈릴레이는 열심히 금성과 목성 등 여러 행성들의 움직임과 상 변화를 관측했고, 마침내 금성 Venus의 상 변화가 기존의 ‘천동설’과 맞지 않는 패턴을 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놀랍게도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힘을 싣는 금성의 상 변화였던 것.


이러한 천체 관측을 토대로 완성된 갈릴레이의 천문학 책, <시데리우스 눈치우스 Sidereus Nuncius>는 ‘지동설의 증거’를 분명히 나타내주는 책이었다.


때마침 당시 피사 대학 교수이자 갈릴레이의 베프 동료였던 베네디토 카스텔리는 갈릴레이의 팬덤을 자처하며 이에 적극 동조했다. 1613년 12월 12일 토스카나 궁전에서 열린 조찬회에 초대받은 카스텔리는, 동석한 같은 대학교 교수인 코시모 보스칼리아가 지동설이 성경 말씀에 위배된다고 디스를 하자, 이에 빡쳐서 지동설 옹호의 열띤 랩배틀을 시작했다.


당시 독실한 신자이자 토스카나 대공의 엄마인 크리스티나 부인도 가세해 열렬한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이렇게 세상은 자신의 ‘앎과 모름’ [일명 무식함]을 스스로의 믿음과 헷갈리는 사람과 사태가 허벌나게 엄청 많다. 모르면 가만히 있으면 중간씩이나 가나…?) 그러나 갈릴레이의 발견을 토대로 한 카스텔리의 설득은 결국 실패했다. (소한테 경을 아무리 읽어준들 무슨 소용… 이것도 사람과 짐승의 차이?)


너무나 우울한 나머지 그는 갈릴레이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그리하여 바로 그 1613년 12월 21일 갈릴레이는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와 프톨레마이오스 Ptolemy의 천동설이 틀렸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옳다’라는 글과 함께 천동설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이들을 돌려 까는 편지를 무려 일곱 장이나 작성하여 카스텔리에게 보낸다.


이 편지가 나중에 여기저기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사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사본을 보게 된 피렌체의 신부인 니콜로 로리니, 평소에 지동설을 겁나 싫어했던 그는, 1615년 2월 7일 이 ‘카스텔리에게 보낸 편지’가 갈릴레이의 이단 신봉을 명백히 보여주는 증거라며 로마 교황청에 고발하게 된다.


이로부터 열흘이 지난 2월 16일 갈릴레이는 카스텔리에게 보낸 ‘편지 원본’을 냉큼 돌려받아, 자신과 친한 피에로 디니 신부에게, ‘로리니 신부같이 사악하고 무지한 샤끼들이 나를 모함한다’라고 토로하면서, ‘이게 내가 진짜 작성한 원본 편지의 사본이오!’라며 그것을 로마에 보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실제로 로리니가 전달한 사본과 갈릴레이가 원본이라고 주장한 사본 사이에는 문맥상 성경을 디스하는 수준이 상당히 달랐다.


로리니의 사본 : 성경을 글자 그대로만 보면 다수의 ‘틀린’ 명제들이 있다 (강한 어조 디스)

갈릴레이의 사본 : 성경을 글자 그대로만 보면 다수의 ‘진리와 다르게 보이는’ 명제들이 있다 (의견 수준)

로리니의 사본 : 성경은 가장 기본적인 교리를 ‘왜곡하는 것’을 삼가지 않았다

갈릴레이의 사본 : 성경은 가장 기본적인 교리를 ‘가려놓는 것’을 삼가지 않았다

로 각각 표현이 되어 있었다. 문맥 차이만으로도 이단 신봉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아주 민감한 차이였다.


그나마 당시엔 성직자들 사이에서도 ‘가설’이라면 ‘지동설’을 용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는데다, 로리니가 전달한 사본 역시 ‘신빙성이 없다’라며 (그래서 갈릴레이가 편지 원본을 냉큼 돌려받았구먼… 영특한 선구자!) 결국 갈릴레이의 무혐의로 일단락되었다.



그 후 갈릴레이가 실제로 카스텔리에게 보낸 원본 편지의 존재는 세상의 관심에서 묻혀졌고, 둘 중 어떤 게 진짜 원본인지는 400년 더 지난 올해 여름까지도 아무도 아는 넘들이 없었다.

드디어 2018년 9월 21일 갈릴레이의 이 원본 편지가 세상에 공개되었는데, 그 결과 충격적인 반전이 400년 만에 드러난 것이다.


갈릴레이가 카스텔리에게서 돌려받은 편지 원본은 피에로 디니 신부에게 사본을 만들어 보내기 전 중간중간에 줄을 치며 수정한 것이 드러났으며, 수정 전후의 글씨가 모두 갈릴레이의 필체임이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정되기 전의 원래 문구대로라면 로리니 신부가 제출한 내용이 원본과 일치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당시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 갈 수 있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원본 문구를 수정했고, 오히려 로리니가 악의적으로 수정했다며 ‘거짓 해명’한 것으로 드러났다. (진실은 아름답지만 추악한 것이여~)


만약 그 당시 로리니 신부의 사본이 원본과 같다고 밝혀졌다면, 갈릴레이는 ‘이단 신봉’이라는 죄를 1633년의 종교재판보다 17년이나 일찍 감당했을 것이며, 그의 유명한 저서인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 Dialogo di Galileo Galilei Linceo Matematico Sopraordinario>나 <새로운 두 과학 Discorsi E Dimostrazioni Matematiche> 등은 세상에 나타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4세기가 지나서 돌이켜보는 갈릴레이와 로리니 신부의 갈등… 그리고 종교재판이라는 종교의 허무맹랑한 독선… 기존의 통념과 지식을 그대로 믿으려는 자들과 스스로 확인하려고 했던 이들 사이에서의 갈등과 알력이 아니었을까?


꼴통들의 견해가 갈릴레이의 이름처럼, 갈릴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가장 핫했던 과학과 역사의 이야기다.


<Unrealscience>를 참고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였던 시대를 벗어나,

'죽느냐 죽지 않느냐의 문제'로 고민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학 교수이자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유발 노아 하라리.

그가 유튜브에서 히브리어로 했던 세계사 강의 영상은, 이스라엘인들 사이에서 수만 조회수를 기록했고, 인류에 관한 간략한 역사를 주제로 한 영어 강의는 전 세계 약 10만 명의 사람들이 수강했습니다.


국내에서도 그의 저서 <사피엔스>는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죠.

이 작가는 왜 죽지 않는 시대를 이야기하는 걸까요? 그의 최근 저서 <호모 데우스>에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몇 가지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시대가 변했다 (배경)


18세기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굶주린 민중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했다는데,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은 이 말도 안 되는 말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비벌리힐스에 사는 부자들은, 양상추 샐러드와 퀴노아를 곁들인 찐 두부를 먹는 반면, 빈민가의 가난한 사람들은 케이크, 치토스, 햄버거, 피자를 배 터지게 먹습니다.


2014년 21억 명 이상이 과체중이었던 반면, 영양실조였던 사람은 8억 5천만 명. 분명 지구 어느 곳에서는 여전히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2030년에는 인류의 절반이 과체중일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시대가 변해 이제는 배불리 잘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걱정이 적어졌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2010년에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이 총 100만 명 정도였던 바, 비만으로 죽은 사람은 300만 명이라고 합니다.


둘째,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문제인식)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먹고 사는 문제에서 벗어나, 어디에 에너지를 쏟고 있는 걸까요?

기아, 전염병,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면, 인류는 무엇을 할까요?

과학자, 투자자, 은행가, 대통령은 하루 종일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낼까요?


독감, 결핵, 암의 원인을 분석하고 병을 고치는 방법 역시 새로운 문제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모두 기술적 문제들이며, 언젠가 그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데 모두 동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바로, '죽지 않는 것', '불멸'입니다.


셋째,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해결욕구)


세상에 태어나 죽는 건 당연한 자연의 흐름이고 이치였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죽음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됩니다.

죽지 않는 것을 꿈꾸는 사람들이 절대 미치광이가 아닌 우리의 삶을 바꿔놓은 사람들, 바로 실리콘밸리의 유명인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멸의 꿈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페이팔의 공동 창립자 피터 틸은 최근 영원히 사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에) 접근하는 방식에는 크게 3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수용하거나 부정하거나 싸우는 것이다. 수용하거나 부정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나는 싸우는 쪽이 좋다."


요즘 들어 자신의 생각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과학자와 사상가 역시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그들은 현대 과학의 주력사업이 죽음을 이기고 인간에게 영원한 젊음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대표주자가 세계적 석학이자 발명가인 레이 커즈와일입니다.

커즈와일은 2012년 구글 엔지니어링 이사로 임명되었고, 1년 뒤 구글은 '죽음 해결하기'가 창립 목표임을 밝힌 '칼리코 Calico'라는 자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 설립된 회사.

얼핏 종교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 구글은 데이터를 가지고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집단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어떤 분석을 통해 칼리코라는 회사를 차리게 되었을까요?


진짜 우리에게 죽음은 더 이상 자연의 흐름이 아닌 새로운 도전과제일까요?


새로운 관점으로 미래를 만드는 사람들, <호모 데우스>

'더 나은 미래'보다는 '전례 없던 미래'를 탐구하고 싶은 분들께 추천합니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 <지식을 말하다>를 참고


Brian Weiss 박사는 정신의학 분야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의사로, 수십 년 동안 전생퇴행 요법으로 수많은 환자를 치료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영적인 지혜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영혼의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던 전형적인 서양 의사였으나, 한 환자가 최면치료 과정에서 전생을 체험한 뒤 증상이 호전되는 것을 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가치관이 흔들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영적인 세계를 접하게 된 후 <나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 Many Lives, Many Masters> <파워 오브 러브 Messages from the Masters> 등의 저서를 통해 우리가 태어난 이유, 삶의 의미,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거리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왔다.




우리는 영적 경험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경험하고 있는 영혼이다.

우리의 삶은 아무런 계획 없이 만들어진 임의의 사건과 행동의 산물이 아니며, 세상에 와서 필요한 것을 배우고 진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도록 신중하고 지혜롭게 설계된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먼저 부모가 될 사람을 선택한다. 대다수의 경우 현생의 부모는 전생에서도 우리와 인연을 맺은 영혼이다. 앞으로 만나게 될 중요한 인물, 소울 메이트나 영적 가족, 심지어 이들과 만나게 되는 계기와 장소까지도 사전에 계획해 둔다.


전에 겪어본 것 같은 상황 또는 가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장소처럼 왠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데자뷔는, 이번 생이 오기 전에 계획했던 일들이 가물가물하게 떠오르면서 물리적인 세상에서 현실화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을 미리 계획하지만 동시에 자유의지라는 것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유의지에 영향을 받기는 해도, 미리 계획한 운명으로 이끄는 주요 사건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운명과 자유의지는 늘 함께 존재하며 서로 영향을 준다. 이 두 가지 개념은 모순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


우리는 사실 죽지 않는다. 단지 의식의 수준이 달라질 뿐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역시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이기 때문에 이별이라는 것도 없다. 우리 영혼이 불멸의 존재임을 깨닫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치유된다.


우리는 빛에서 왔으며 동시에 빛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지혜로운 존재이다. 우리 모두는 이것을 꼭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는 지구라는 학교에서 뭔가를 배우기 위해 잠시 이곳에 온 신성한 존재이고, 자신이 배워야 할 것을 정해 스스로 수업시간표를 짠 학생들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영혼과 경쟁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있고 그들이 가야 할 길이 따로 있을 뿐이다. 경쟁은 없다. 그저 함께 깨달음의 빛을 향해 서로 도와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육신이 죽음을 맞이한 후에는, 육신에서 나온 영혼이 더 높은 차원으로 이동하여 계속해서 공부에 매진한다. 사후세계에서 영혼은 이승의 삶을 돌아보고, 이 과정을 통해 삶의 교훈을 배우고 다음 번 생을 준비한다.


환생하면서 우리는 여러 인종과 종교, 성별, 생활수준을 경험한다. 카르마(業)는 궁극의 정의이다. 우리가 삶을 통해 배우는 과정에 대충 넘어가는 과목은 없다. 환생은 우리가 현생에서 경험하고 있는 인간관계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오랜 과거(전생)에 있었던 일들이 현생의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는 살아있는 실험실과도 같다. 우리가 영적으로 얼마나 성장했는지, 삶의 교훈을 제대로 얻었는지, 환생 전에 계획한 삶의 목표에 어느 정도 근접했는지 알아보는 실기시험 같은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갚아야 할 빚을 안고 있다. 이번 생에서 그 빚을 다 갚지 못하면 다음 생에서 갚아야 한다. 그래야만 균형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빚을 갚아나가면서 성장한다.



카르마는 영혼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훈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지, 고통스러워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살면서 장애물이 아예 없거나 많지 않을 때보다는 장애물이 많을 때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어려운 인간관계, 각종 장애물과 상실로 가득 찬 삶일수록 영혼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진다.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독립심과 자유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집착, 결과, 타인의 의견, 타인의 기대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집착을 벗어던지면 자유를 얻게 된다.


물질에 얽매이지 않게 노력하라.

3차원의 세상에서 우리는 물질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배운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재산을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육신이 사라지고 영혼이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때 우리가 가져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한 일, 선행과 악행, 생각과 지식이다. 얼마나 많은 재물을 축적했는지 보다 타인에게 어떻게 대했는지가 억만 배 더 중요하다.


물리적인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행동을 해야만 한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하고, 그들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민의 정을 베풀어야 한다.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작은 일들을 위대하게 해내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선생이자 학생이며, 우리가 가진 지식을 서로 공유해야 한다.


천국이라는 것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고, 모든 기쁨과 행복도 우리 안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고 깨달으면서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상대를 적극적으로 사랑해보자. 과거의 일로 슬퍼하거나 후회하지 말자. 이미 끝난 일이다. 지금 다시 시작하자. 언제든 사랑과 연민을 표현할 수 있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우리 영혼은 항상 사랑의 에너지에 이끌리게 되어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아우르고, 사랑의 치유 에너지가 우리의 몸, 정신 그리고 영혼을 순식간에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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롭상 람파가 전하는 삶과 영혼의 가르침

https://blog.naver.com/ishipworld/221332869101


출처 : <Messages from the Mas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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