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젠더 간의 갈등이 한창이다.

남성 혐오주의와 여성 혐오주의가 일상적으로 뉴스에 단골 손님으로 등장하며, 과격 시위뿐 아니라 폭력까지 발생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 자신들의 성별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똘끼 충만한 자들도 나타나고 있다. (우기면 더 우월해지나?ㅋㅋ) 젠더 간의 충돌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인류의 과거 양상과는 꽤 다른 모습이다.

인류는 많은 갈등과 싸움을 거치면서 역사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그 갈등과 싸움의 원인이 지금처럼 성별이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지배계층은 남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여성은 수동적인 위치에서 조용히 역할을 다 하고 있었다. 정치인, 고위 관료, 법관, 성직자 등 사회의 상류층은 거의 남성의 차지였다. 이는 서구세계뿐만 아니라 유교 중심인 동양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현대에는 많은 국가에서 남존여비 사상이 사라졌다. 대놓고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말하는 경우도 별로 없다. 이런 차이의 원인을 문화적, 종교적 영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문화적, 종교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위에 있다라는 개념이 계승되면서, 우리들의 관습과 행태에 뿌리깊게 박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수만 년간 유라시아 대륙, 단절되어 왔던 아메리카 신대륙, 그리고 태평양의 많은 섬들의 원주민 사회 대다수도 남성 중심 사회였다.

즉, 인류가 나타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남성이 더 우월한 지위를 갖춘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남성이 더 사회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던 세 가지 이유와, 이에 대해 유발 하라리가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말한 반박까지 함께 살펴보자.


1) 근력의 차이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힘이 세기 때문에 남성이 완력으로 여성을 굴복시켰거나, 남성이 더 힘든 일을 함으로써 더 큰 영향력을 가져갔다는 분석이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논리지만, 유발 하라리는 육체적 힘과 사회적 권력은 서로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비판한다.


오히려 과거 여성들은 근력이 필요 없는 정치인, 성직자, 법률가라는 직업보다는 신체 노동이 많은 가사일, 수공예, 들일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20~30대 청년들이 60~70대 연장자들보다 힘이 훨씬 셈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힘은 연장자들에게 있다.



2) 남성의 공격성과 폭력성

이런 공격성으로 인해 남성은 전쟁을 일삼았고, 전쟁에서의 영향력을 자연스럽게 사회적 영향력으로 가져가면서 남성 중심의 사회가 펼쳐졌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는 군대에서의 지휘관과 사병의 필요 덕목이 다른 점에 주목한다. 군대에서의 장교나 지휘관은 체력이나 공격성보다는 조직력, 협동력, 유화책 등의 지혜로움이 더 중요시 된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군대에서 지휘관은 거의 귀족, 부유층 등에서 잘 교육받은 자들의 몫이었고, 하층민들이 주로 사병 역할을 맡았다. 공격적이고 폭력적이어야만 지휘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3) 출산과 관련한 번식 전략의 차이

남성은 여성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해야 하고, 그런 경쟁에서 이긴 남성의 유전자만이 살아남는다. (인간도 하나의 유전자 운반체라는 개념이 포함됨.) 반면 여성은 임신기간과 양육기간에 식량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식량을 가져다 줄 남성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고, 헌신적이고 순종적인 유전자가 후대에 전해진다는 이야기다.


남녀의 생존전략이 달랐기 때문에 남성은 야심 있고 경쟁적인 성향을 띄는 반면, 여성은 아이를 돌보고 키우는 경향이 컸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발 하라리는 동물들의 세계를 보면 수컷과 암컷의 생존전략에도 불구하고 모권 중심 사회가 나타난 종이 많다고 한다.


암컷들은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회적 기술을 발달시켜, 협력과 설득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서로 돕고 새끼를 키운다. 그러나 수컷들은 싸우고 경쟁하는데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결국 협력적인 암컷 위주의 강력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자기중심적이고 비협력적인 수컷들은 변방으로 밀려난다는 분석이다.


그러면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

다소 허무한 결말이지만, 유발 하라리는 ‘모르겠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한 출판사가 진행한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흔히 질문으로 시작은 하지만, 곧바로 자신만의 이론을 개발하여 자신이 물었던 질문보다는 자신의 이론을 방어하는데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즉,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고, 그 답을 방어하기 위해 논리와 이유를 전개한다는 것.

모르는 것은 그냥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명확성이 배가되고, 무지를 덮기 위한 구차한 설명은 시작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장 현명한 철학자로 기억되고 있으며, 공자 역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누구의 말이 보다 타당성이 있어 보이나?


<BetterLife>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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