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는 언제 우리에게 권력을 쥐여주는가?

우리가 열정적으로 일할 때다.

공동체의 이해관계를 큰 목소리로 강단 있게 옹호할 때다.


▷우리는 언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가?

우리가 너그러울 때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귀하게 여기며, 그것에 공감하고 같이할 때다.


부장 땜에 회사 못 다니겠어!

우리 팀장은 진급하더니 더 유난스러워졌어!

직원들끼리 얘기하다 늘 나오는 불평입니다.


직접 해도 될 일을 부하 직원들에게 떠넘기고, 예민할 때 찾아가면 화를 내는 등 기분대로 행동해서 불만이 속출합니다.

윗 사람의 위치에 있는 만큼 능력도 성격도 좋아야 할 것 같은데, 우리 사회에는 존경하는 상사보다는 '눈치 봐야 할 상사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왜 좋은 상사는 주변에서 찾기가 힘든 걸까요?




대커 켈트너는 저서 <선한 권력의 탄생>에서, 그들이 '권력의 역설에 빠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관계도 원만하고 업무 능력도 뛰어나 승진한 건데, 지위와 권력을 얻는 순간 좋은 특성들을 다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권력 뒤에는 늘 유혹이 기다리고 있지요.

권력을 쥐게 되면 긍정적인 감정이 솟아오르고, 자신에게 무한한 기회가 주어진 것만 같죠. 하지만 그 유혹은 썩은 동아줄에 비유됩니다. '황금 동아줄'인 줄 알고 잡은 권력이 툭하고 끊어져 결국에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지요.


실제로 권력에 취한 사람들을 보면,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다른 사람과 공감하지 못해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읽지 못하고, 좋은 게 있으면 나눠주기보다는 자신이 먼저 챙기며, 고마움을 표현해 인정해주기보다는 무례한 행동으로 상대에게 무력감을 안겨줍니다.


'권력의 역설'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공감 능력, 배려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 생겨납니다.

이와 관련된 실험 결과도 있는데,


실험 참가자는 '권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권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두 집단으로 나뉩니다. 이들에게 세 개의 얼굴 사진을 보여준 뒤 각각의 사진이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지, 네 개의 보기 중에서 고르게 했습니다.


답은 '결단력 있는', '걱정에 사로잡힌', '고집하는'인데, 실험 결과 평균 정답률은 70%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권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평균보다 낮은 점수를 기록했습니다.

권력에 대한 자각이 공감 능력을 떨어트려 타인의 감정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권력을 얻기 전의 나'를 떠올리며 권력의 역설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공동체는 언제 권력을 쥐여주는가?

▷언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가?


권력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열정적인지, 너그러운지, 평정심을 잘 유지하는지, 열린 마음을 가졌는지 등을 검증한 뒤 '우리'라는 공동체를 위해 행동해 달라고 권력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권력자들은 이 사실을 망각한 나머지, 지지자들을 무시하고 안하무인의 태도로 권력을 휘둘러, 결국에는 권력을 잃고 말죠.


지금이 16세기라면 그런 태도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묘사된 것처럼 당시의 권력은 강압과 권모술수를 통해 움켜쥘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현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권력은 '선한 권력'입니다.


아랫사람들의 신뢰와 함께 더 큰 권력을 얻으려면 선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개인의 욕망과 타인에 대한 관심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힘을 좋은 방향으로 쓰기 위해 공감하고, 나누고, 고마움을 표현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개인은, 두 개의 길 중 하나로 나아간다고 합니다.

하나는 충동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권력 남용의 길.

다른 하나는 자애로운 행위를 하는 최대 선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공동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최대 선의 길'을 택하세요.


한편으로 여러분이 바라는 상사의 모습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어떤 상사를 원하시나요?

이것만큼은 상사가 가졌으면 좋겠다 하는 자질이 있나요? 한번 써보세요.

그것이 바로 머지않은 미래의 당신이 가져야 할 자질입니다.


'민감하거나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말은 대체로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된다.

내성적이고 민감한 사람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거나, 불안정하고 수줍음을 많이 탄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피곤한 타입'으로 취급받곤 한다.


그렇지만 '민감함'은 좋은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아주 특별한 능력이다. 이런 사람들이 아주 '뛰어난 능력자'라는 증거 몇 가지와 함께 그 능력의 적용 방법도 살펴보자.


1) 탁월한 감정이입 능력

민감한 사람들은 상대의 이야기를 들을 때 공감하는 정도가 매우 높다. 이들은 타인의 기쁨과 슬픔을 자신과 분리하지 않고, 그 감정을 오랫동안 간직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남을 돌보는 직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고, 그 분야에서 능력도 인정받는다고 한다.



2) 뛰어난 상황 파악 능력

이들은 자신의 환경 속에 갈등 요소가 있을 때 견디기 힘들어한다. 그들에게 언쟁이 벌어지거나 긴장감이 도는 자리는 항상 가시방석 같다. 본능적으로 이들은 성능이 매우 좋은 안테나를 늘 지니고 다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민감한 이들은 주변 상황을 직관적으로 명확하게 감지할 수 있고, 불편한 상황 대처 준비를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신속하게 할 수 있다.


3) 철저하고 신중함

높은 민감성을 보유한 사람들은 한 가지 일이 가지는 다양한 측면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무언가를 파악하기 위해 남들보다 많은 시간을 들이며, 사려 깊고 독창적인 성향을 보인다. 예술가, 작가, 사상가 가운데 유독 예민한 사람들이 많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4) 높은 도덕적 기준과 책임감

민감한 이들은 대부분 양심적이고, 자신 주변의 모든 일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자기를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들어도, 규칙을 어기거나 이기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는 그 상황에 개입해야 할 책임을 느끼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드러나지 않게 힘쓴다. 또한 남에게 고통이나 불편을 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피한다.


이들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지나친 에너지를 쏟기 때문에,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좋은 행동 양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5) 자신에게 매우 엄격함

민감한 사람들은,

'이건 무례한 행동이야'

'내가 지금 너무 이기적인가?'

'그때 좀 더 사려 깊게 행동해야 했는데'

와 같은 생각을 많이 한다.


이처럼 이들은 행동 판단 기준을 높게 잡기 때문에 항상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찰 한다.

민감함은 결코 까다롭거나 피곤한 성격이 아니라, 인격을 풍요롭게 만드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민감함은 신이 주신 최고의 감각이다.


책 <센서티브 Highly Sensitive People>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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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두번에 걸쳐 4차 산업혁명의 정의와 개념, 그리고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에 대한 글을 올린 바 있는데, 오늘은 '사람의 역할'에 관한 것입니다.


"인간은 이제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건가요?" 
기자가 물었고, 한 석학 (<전문직의 미래>저자 Daniel Susskind, 옥스퍼드대 교수)이 대답합니다. 

'두 가지 전략이 있다.' 
첫째는 기계와 경쟁하는 것 
기계가 현재 잘하지 못하는 부분을 사람이 담당하는 방법이다. 창의성이나 판단력, 대인관계를 활용한 일을 말한다. 

둘째는 기계를 만드는 것 
더 능력 있는 시스템과 기계를 설계하고, 조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이다.



첫째에 대해 다른 석학 (Jerry Kaplan, 인공지능학자, 스탠퍼드대 교수)이 덧붙입니다. 

인간이 기계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은 매우 많지만, 하나만 꼽으면 '표현하는 능력'을 펼치는 일이다. 어떤 곡을 연주하거나, 스포츠 경기를 뛰는 종류의 일을 말한다. 물론 로봇도 바이올린을 켜고 달리기를 할 수 있다. 그런데 누가 그걸 보고 싶어 할까? 

힘든 하루가 끝난 뒤, 로봇 바텐더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으려 할까? 이런 면만 봐도 걱정할 게 없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한편 한국의 한 창업가(김동호, 아이디인큐 창업가, 한국신용데이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향후 수십 년 동안은 기계와 인간이 직접 경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경쟁의 양상은 아마도 새로운 기계를 잘 다루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겠죠. 모두가 코딩을 해야 하거나 서비스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시장을 바꾸는 서비스를 앞서서 써보고, 익숙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건 20년 전에 엑셀을 잘 다루는 것과 같을 거예요.


기자 5명이 뜻을 모아 '인간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화두를 석학 4명과 한국의 뉴칼라 8명에게 물었습니다. 그 결과가 책 <새로운 엘리트의 탄생>에 담겨 나왔습니다. 

저자들은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다음으로, 사회를 이끌어나갈 사람을 '뉴칼라 New Collar'라고 이름 붙입니다. 뉴칼라는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만의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 빠르게 변하는 일의 지형에서 자신의 영역을 앞서 개척하는 이를 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가지며 물어봅니다. 
▷제 일자리는 안전한가요?
▷언제 로봇한테 일자리를 빼앗기게 될까요?

중요한 건 '지금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입니다. 
책에서 대니얼 서스킨드는 '훈련을 통한 직업 재배치'를 해결책으로 꼽습니다. 기계가 할 일과 사람이 할 일을 나누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는 책의 저자들이 말하는 뉴칼라의 다섯 가지 조건 중 'Digital Litaeracy' 내용과 이어집니다. 디지털 리터러시란 생산 도구로써 컴퓨터를 활용하고 다루는 능력을 뜻합니다. 자동화되는 영역에서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우리는 시중에 나와있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변호사는 초당 1억장의 판례 문서를 분석해주는 프로그램인 로스(ROSS)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하고, 신문기자는 로봇이 사건 발생 5분만에 작성한 기사 초안을 다듬어 발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책 속에서 한 뉴칼라는, 정말 중요한 것은 '디지털 기술에 대해 심리적 장벽을 세우지 않는 것'이라고 조언합니다. 


동영상 콘텐츠로 유명해진 셀레브의 임상훈 대표는 '디지털 리터러시'가 높은 사람입니다. 그는 코딩과 웹디자인, 업무용 프로그램 설계를 스스로 해왔죠. 학교나 학원을 한번도 다니지 않았고, 혼자서 책이나 인터넷을 뒤져가며 지식을 익혔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오히려 기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안목을 갖추는 것이 훨씬 어렵죠.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디지털 세계에서 어떤 것이 어디에서 소비되는지 같은 사항 말입니다. 프로그램은 그냥 해보면 돼요. 용기가 더 중요해요." 

다시 핵심 질문, '인간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로 돌아가 봅시다. 
이 질문의 핵심은 '기계가 따라잡을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 역량이 존재하느냐'입니다. 많은 공학자와 경제학자는 '그렇다'라고 대답합니다. 

창의성, 공감 능력, 소통 능력은 인간의 고유 역량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정반대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방식이 달라서 그렇지 기계 또한 무언가를 창조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저자들은 미래를 뜻하는 'Futures'는 단수가 아닌 복수로 쓰이는 만큼, 미래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과의 인터뷰를 소개하지요. 

그 다양한 사람들이 말합니다. 
"미래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아직 준비할 시간은 남아있다'라고 합니다. 


당신은 어떤 일을 할 건가요?
기계와 맞서 싸우겠습니까? 기계를 만들겠습니까? 아니면 만들어진 기계를 활용하겠습니까? 

새로운 엘리트가 될 준비가 되었나요?

새로운 엘리트의 탄생
국내도서
저자 : 임미진 외 4인
출판 : book by PUBLY(북 바이 퍼블리) 2018.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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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쓰이는 말 '팩트폭행, 팩트폭력' =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팩트, 즉 모두가 인정할 만한 사실을 제시하며 잘못된 점을 꼬집어 설명하는 행위


폭행, 폭력이라 부르는 만큼, 때로는 상대에게 아프게 타격을 주기도 합니다. 맞는 말이기 때문에 딱히 반박할 수도 없지요.


이것의 시작은 엉터리 선동과 여론 조작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언론의 기사나 시국을 시원하게 꼬집고, 사람들에게 통쾌함과 웃음을 선사했지요. 조금은 긍정적인 의미로 일상생활이나 SNS에까지 많이 쓰이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외국에서 'Stop Using Facts!'라는 말이 먼저 유행되었습니다. 팩트폭행은 인터넷 여론의 자정 작용을 도와줍니다. 일부 정치인의 몰상식과 무능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에 '사이다 팩트폭격기'로 불리며 속을 후련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팩트폭행이라는 글이나 덧글을 보면, 가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그저 말로 남을 헐뜯고 깎아내리는 단순한 언어폭력마저도, 팩트를 제시했다는 것만으로 팩트폭행으로 둔갑하기 때문입니다.


폭행을 가한 가해자들이 팩트폭행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서, 오히려 자신은 사실만을 말하는 팩트폭격기(?)라며 의기양양해 합니다. 인터넷에서는 팩트폭행의 문제가 더 빈번하고 심각합니다. 오프라인과 달리 온라인에서는, 말이 관계를 쌓기 위한 도구가 아닌 대결의 도구가 되기 쉽습니다.


서로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 그리고 다시 안 봐도 될 수 있는 상황은 상대방의 기분을 고려할 필요가 없게 만들고, 앞에서는 하지 못할 말들을 거리낌 없이 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말은 도구로만 행세하고, 그 행위는 지식 자랑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팩트폭행은 말 그대로 사실만을 말하는 건데, 뭐가 문제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속에 내포된 2가지 의미를 살펴보죠.


1) '가르치기'와 '네가 틀렸어'

"그거 읽어본 적은 있냐? 가서 논문하고 책부터 좀 읽어보고 와라."

"해외서 몇 년 살아봐서 아는데, 괜히 아는 척하지 마라."

"뭣도 모르면서 글 쓰고 있네."


팩트를 제시한 것 같은데, '토론'이 아닌 '가르치기'가 됐군요.

원하지 않는 가르침은 상대방을 나보다 낮은 존재로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결국은 네가 틀렸으니, 내가 가르쳐주겠다는 의도지요. 가르치는 것은 오직 상대방이 가르침을 원할 때 뿐입니다. 원하지 않는 가르침은 조언이 아닌 '폭행이나 폭력'이기 쉽지요.


2) 인신공격

"꼭 머리 나쁜 애들이 저런 말하더라."

"애인도 없이 집에 처박혀 있는 애들이 아는 척한다."

"사회문제에 관심도 없는 애들이 있어 보이려고 덧글 쓰지."


우리는 가끔 상대방의 의견이 잘못된 경우, 그 의견을 비판하지 않고 상대방을 비난합니다. 상대방이 무식하고 몰상식하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의견이 나온다는 '인신공격'으로 연결됩니다.



그렇지만, 그의 의견이 틀렸다고 해서 그가 부족한 사람은 아닐 겁니다. 우리 모두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선동에 취약하고 공부도 부족하지요. 누구나 처음부터 팩트를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가끔은 팩트라는 어떤 사실이 뒤바뀌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잘못된 주장을 한다면 그 주장을 비판해야지요. '네가 틀렸어'가 아니라, '네 의견이 틀렸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팩트폭행은 무엇일까요? 과연 올바른 팩트폭행이란 게 존재나 할까요?

토론이나 언쟁의 목적은, 자신이 올바르다 생각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제시해 상대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내 주장에 수긍하고, 내 논리를 이해하고, 내 방향에 공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럴 때 팩트폭행을 하면서 상대를 깎아내리고, 무시하고, 비난하면, 상대방은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보호하려 하지요. 자신의 주장과 자존심을 동일시하면서 반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팩트폭행은 도덕성의 문제를 넘어서,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자제 되어야 한다고 보입니다.


반론 할 때 내 목적을 먼저 생각해 봅시다.

비웃는 말투, 문제를 벗어난 인신공격, 남을 가르치려는 태도가 내 목적에 부합하나요? 내 목적이 그들을 낮춤으로써 나를 높이는 것인가요?


각자의 삶에서 개개인이 추구하는 가치나 생각이 일치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상대를 팩트로 폭행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걸까요?


온라인상에서 팩트폭행이라는 명목하에 남을 깎아내리는 것이 영웅시 된다면, 일상에서조차 말로 남을 폭행하는 사태가 더 빈번해지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상대방에게 굴욕감을 주기 위해 팩트를 남발할까 두려워집니다.


팩트라는 것만으로 잘못된 목적이 정당화될까 봐 걱정됩니다. 말이 가진 힘은 굉장히 커서, 말을 어떻게 하느냐가 곧 자신을 규정하게 됩니다.

말은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은 인격이 됩니다.


우리가 '팩트폭행'을 시원하다라고만 생각하며 당연시 여기게 된다면, 그다음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 모두 다시 한번 생각해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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