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가 여전히 인기 있는 이유는 등장하는 인물들의 처세술과 리더십이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늘 새로운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국지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조명을 받는 인물도 계속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를 중심으로 제갈량, 조운 등이 주목 받다가, 조조로 관심이 옮겨가더니, 최근에는 사마의를 새롭게 떠올리고 있다.

 

사마의가 대중적으로 재조명되며 다르게 평가된 계기는 중화TV에서 방영한, <사마의: 미완의 책사>와 그 후속작인 <사마의: 최후의 승자> 때문일 것이다.

중년남성 중심으로 많은 시청자가 사마의에 매료되었다는데, 삼국지를 색다르게 해석하며 다른 관점을 제시했기에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지난해 <결국 이기는 사마의>와 같은 사마의 평전이 새로이 출간되기도 했다.

 

여기서는 사마의의 인생을 통해 삶의 지혜, 방향과 선택 그리고 처세 등에 대해 살펴보자.

(다만 한가지, 병법서나 중국의 유명한 고전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전략, 전술, 술책 등의 근본 바탕이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는 방법과 행동의 집합이라는 점은 항상 명심하고 웃으면서 소화해내자.)

 

1) 참을 때는 독하게 참아라!

사마의는 무엇보다 오래 기다리고 버틸 줄 아는 인내심의 대가였다. 중국 역사상 그에 필적할만한 사람은 없을 듯하다. 관련한 흥미로운 일화는 조조와의 수 싸움(통박)이다.

어느 날 조조는 사마씨 가문에 사람을 보내 출사 할 나이가 된 사마의에게 벼슬을 내렸다. 실력 있는 주인을 기다리던 그에게 조조의 부름은 보기 드문 기회였다.

 

하지만 사마의는 그 벼슬을 거절한다. 당시 조조의 말을 거절함은 곧 사망을 의미하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왜 그는 조조의 명을 거절했던 것일까?

어렸을 때부터 비범했던 사마의는 일찌감치 조조라는 보스를 ‘쉽게 다룰 수 없는 사람, 모시기 힘든 보스’로 보았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조의 부름에 그는 중풍에 걸렸다는 핑계를 대며 조조의 명을 피했다. 그렇지만 조조도 그리 쉽게 속아 넘어갈 상대는 아니었다.

조조는 웃으면서 ‘꾀병이라면 내가 원조여! 십대 때 중풍에 걸린 척해서 숙부를 골탕 먹인 나를 네깟 게 속일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리고는 부하를 시켜 사마의를 몰래 정탐하게 했다.

정탐을 끝낸 사자는 조조에게 사마의가 틀림없이 중풍으로 병상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다고 보고했다.

 

사마의 역시 조조가 자신을 계속 주시하며 감시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몸을 사렸다. 그의 아내 장춘화는 정탐꾼이 떠났다며 이제 일어나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는 시종일관 환자 행세를 하며 조조의 눈을 피했다.

사마의는 참을 때는 독하게 참고, 감출 때는 깊숙이 숨기는 성격이었다. 이 때문에 중풍이 나을 때까지 그 후로 몇 년 동안 병상에서 꿈쩍도 하지 않으며 자신을 철저히 숨겼다.

 

삼국지 인물들의 성격을 이야기할 때 이렇게 표현한다.

만약 새가 울지 않는다면, 조조는 울게 만들고, 유비는 울어달라고 청하며, 사마의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고 말한다.

 

몇 년 후 조조는 다시 사마의를 부른다.

<진서(晉書) 선제기>에는, ‘사마의는 조조가 두려워 나아가 직무를 맡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의는 더 이상 거절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마침내 부름에 응한 것이다.

조조는 그를 곁에 두었지만 신하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을 인물로 여겨 늘 경계했다.

 

 

2) 강한 놈이 오래가는 게 아니라 오래가는 놈이 강한 놈이다!

사마의는 73세까지 장수하며 조조, 조비, 조예, 조방까지 4대를 보필했다. 각 보스 밑에서 언제나 핵심 인사였고, 4대에 걸쳐 원로 역할을 수행하며 결국 서진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제갈량과 비교되며 2인자에 머물렀던 그였지만, 결과적으로 손자인 사마염이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며 최후의 승자가 된다.

 

비록 전술적 측면에서 제갈량이 한 수 위였을지 몰라도, 전략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사마의가 앞섰다고도 볼 수 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호걸들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던 사마의, 과연 그는 어떻게 난세에서 살아남으며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일까?

 

조조는 후계자인 자신의 아들 조비에게, ‘사마의는 낭고의 상 (이리가 뒤를 돌아보는 상)이라 믿으면 안 된다. 그는 절대 남의 밑에서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일러주었다.

조조는 사마의를 경계했고, 언제든 제거할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마의 역시 조조의 의중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매사 신중하게 행동하며,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진서 선제기에도, ‘사마의는 직무에만 몰두하여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열심히 일했고, 풀을 뜯고 방목하는 작은 일도 모두 다 물어보고 시행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성실하게 땀 흘리는 책략을 사용하며 조조를 안심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다. 처세술의 기본인 자세를 낮추고 겸허하게 자신의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며 위기를 돌파해 나갔다.

 

조조 사후에는 그의 아들 조비를 보필하며 사실상 2인자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조비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면서, 그의 아들 조예가 황제로 즉위한다. 사마의는 의심 많고 변덕스러운 조예를 보필하면서 때론 내부의 지지를 이끌어내기도 하고, 한편으론 단호하게 행동하며 위기를 모면해 나갔다.

 

 

3) 평상심을 지키고, 인재를 활용하라

사마의는 평상심을 유지하는 고수였다.

오장원 전투에서 그는 제갈량의 촉군에 비해 우세했지만, 지구전을 펼치는 전략을 사용했다. 조급해진 제갈량은 사마의에게 사자를 시켜 선물을 보낸다. 긴장한 사자를 보며, 사마의는 제갈량이 보낸 상자를 흥미롭게 살펴본다.

 

상자 안에는 비단으로 싸인 것이 있었는데 감촉이 보들보들했다. 싸인 비단을 풀자 여인의 옷과 장신구가 나왔다. 체면을 중시하는 보통의 장수라면 크게 자존심이 상해서 흥분하고 뛰쳐나가 제갈량의 묘수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마의는 오히려 제갈량의 급한 마음을 알아채고, 반대로 선물을 들고 온 사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제갈 승상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는가? 잠은 잘 주무시는가?”

사자는 기뻐하며 이 기회에 제갈 공명의 훌륭한 인품을 제대로 선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승상께서는 매일 수탉보다 일찍 일어나시고 부엉이보다 늦게 주무시며, 공무를 처리하느라 늘 바쁘십니다.’

“참 부지런하시구나. 그런데 다른 직급의 공무도 승상께서 직접 처리하시는가?”

사자는 더욱 의기양양해하며 자랑하듯 말했다.

‘곤장 20대 이상의 일은 직접 관장하십니다.’

사마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또다시 묻는다.

“그럼 매끼 식사는 얼마나 드시는가?”

‘매끼를 절반 정도밖에 안 드시는데, 그것도 제때 못 챙겨 드실 때가 많습니다.’

 

사자가 떠나자 사마의는 부장들에게 말했다.

“제갈량은 하는 일은 많고 먹는 건 적다는데 어찌 오래 살 수 있겠는가?”

사마의는 제갈량이 과로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예감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들어맞았음을 확인하고 제갈량이 나가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사마의는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제갈량, 어쩌면 나 혼자서는 당신을 당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사람마다 자기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고, 여러 사람의 지혜와 힘을 모을 수가 있다. 반면에 당신은 뛰어난 재능과 지혜를 믿고 남의 도움 없이 무슨 일이든 직접 하려고 한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실수는 하게 마련이다.’

 

사마의는 근심하고 고생하며 아침저녁으로 애쓰는 제갈량의 심신이 오래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갈량은 고된 군무에 쓰러지게 되고, 군중에서 5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4) 큰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신언수구(愼言修口)’하라!

‘나무는 조용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한다’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나와 비교하고, 내가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나와 경쟁한다. 만약 하고 있는 일이 잘 풀린다면, 누군가는 이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방해까지 할 것이다.

 

사마의가 승승장구하자 수많은 경쟁자들이 호시탐탐 그를 노리게 된다. 그는 그 위기를 어떻게 돌파해 나갔을까?

사마의는 무엇보다 말을 조심했다.

옛사람들은 큰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신언수구(愼言修口)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을 할 때는 신중해야 하고 절대로 아무 말이나 막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마의는 관직 생활을 함에도 감정이나 자신의 대우에 관해 결코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설령 업무를 말할 때에도 비교적 겸손한 태도로 요지만 간략하게 언급할 뿐 개인적 감정은 표현하지 않았다.

그는 지위가 높아질수록 자신의 입을 잘 관리했다. 성공할수록 목소리를 낮추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적을 만들기 쉽고, 다른 사람 원망을 사기도 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병은 입으로 들어오고 화는 입에서 나온다고 한다.

신중하지 않은 한마디나 적절하지 않은 말로 인해 별일 아닌 일이 큰일로 변해 종종 수습할 수 없는 국면을 초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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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실력이 곧 생존이다!

사마의의 가장 중요한 무기는 무엇보다도 뛰어난 실력이었다.

말에 올라서는 칼을 잘 휘두르고 내려서는 붓도 잘 휘둘렀다. 무력으로는 공명과 싸우고, 맹달을 사로잡고, 요동을 격파했으며, 문으로는 미관말직과 황제의 비서 역할을 10여 년씩 하며 무슨 일이든 잘 해내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인재가 되었다. 곧 실력으로 생존을 보장받은 셈이다.

 

조조가 사마의를 제거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도 어쩌면 그가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부귀(富貴)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반드시 능력과 수양이 뒷받침되어 있어야 한다.

 

부귀를 추구할 때 정말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내가 이 엄청난 재산과 권력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일 것이다. 권력이 재능보다 높으면 반드시 욕됨이 있게 마련이고, 위엄이 덕성보다 높으면 꼭 화근이 뒤따른다고 한다.

그래서 인생의 부귀의 길에 서 있는 사람은 지나친 탐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마의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인생의 지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친타오 저 <결국 이기는 사마의>, 자오위핑 저 <자기 통제의 승부사 사마의 : 자신을 이기는 자가 최후의 승자가 된다> <북올림>을 참고

코카콜라에 대한 여러 소문이 많이 있죠?

대표적으로는 ‘종신 임원 2명이 같은 비행기를 타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라는 회사 방침도 있다는데, 이런 것이 진실인지 뜬소문인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음료수를 만드는 회사에서 새로운 제품을 출시했을 때, 이 제품이 대박이다 아니다의 기준점은 ‘칠성사이다’라고 합니다. 사이다는 대박도 쪽박도 아닌, 꾸준히 잘 팔리는 Steady Seller이기 때문 이라네요.


1886년 설립된 이래 오랜 역사를 가진 코카콜라, 지금까지 무려 약 6조 개를 팔아먹은 코카콜라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한 번 마시면 뻑! 가는, 그 맛의 독특함에 있다고 합니다. (소비자들의 반응이니…쩝)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코카콜라의 아성에 도전해서 로컬콜라를 개발한 몇몇 기업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 어떤 나라에서도 코카콜라를 이기는 음료를 개발하지는 못했지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포되어 있는 코카콜라 제조법과 관련된 전썰은, 사실은 완전히 ‘뻥과 구라’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 썰의 출발점은 1916~193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약사 존 S. 팸버튼 박사는 1886년 코카 Coca의 잎과 콜라 Kola 나무의 열매, 그리고 코카인을 섞은 약제를 만들었다. 만병통치약으로 소개된 이 약은 (거제도 오비에도 20년 전까지 이런 걸 만들어 팔던 할머니가 한 분 계셨는데…?) 제이콥 약국 Jacob’s Company에서 단돈 5센트에 판매됐는데, 바로 이것이 코카콜라의 시작이었다.


제이콥 약국의 경리를 맡고 있던 프랭크 로빈슨은 이 5센트짜리 약제에 ‘코카콜라’라는 이름을 붙이고, 두 개의 대문자 C를 흘려 쓴 스펜서체의 코카콜라 브랜드 로고까지 만들었다.


시골잡화상의 약제로 수명을 이어가던 코카콜라는, 1888년 약제상 아서 캔들러를 만나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팸버튼으로부터 코카콜라 브랜드와 사업권을 2300달러에 사들인 캔들러는, 1889년 <애틀랜타 저널>에 전면광고를 실으며 본격적인 마케팅에 돌입했다.


대대적인 마케팅과 공장설립 등으로 캔들러는 1914년까지 무려 5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고, 1916년에는 애틀랜타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캔들러는 1919년 코카콜라를 2500만 달러에 팔고, 사망한 1929년까지 자선사업가로 지냈다.


1919년 캔들러로부터 회사를 매입한 아버지 어니스트 우드러프의 뒤를 이어, 1928년 사장에 오른 아들 로버트 우드러프는 코카콜라를 세계적으로 성장시킨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우드러프는 그 해 열린 암스테르담 올림픽 미국 대표팀에게 코카콜라 1000상자를 후원하는 마케팅을 펼쳤다.


올림픽에 참가한 사람들은 미국 대표팀이 마시는 검은 음료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콜라는 금세 대회장에서 유명세를 타게 됐다. 이는 콜라가 미국을 벗어나 유럽시장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은 코카콜라에게 큰 기회가 됐다. 우드러프는 미군이 배치된 모든 전장에 코카콜라를 한 병당 5센트에 공급했다. 전쟁 기간 50억 병의 코카콜라가 그렇게 팔려나갔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유럽과 남태평양 등지에 64곳의 보틀링 공장이 지어졌다. 코카콜라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도 그 직후인 1950년대 6·25 전쟁을 거치면서다.


당시 코카콜라를 인수했던 어니스트 우드러프는 의도적으로 언론과 대중 앞에서 ‘코카콜라 원료의 비밀, 어쩌구 저쩌구’하며 떠들어 댔답니다. 그 목적은 콜라를 살 때 뭔가 특별한 것을 사는 것처럼 느끼도록 만드는 소비자 기만 전술이었다네요.


이에 더해 1925년에는 서면 허가와 회사 최고위층 입회 없이는 성분표를 열람할 수 없도록 하는 내규를 코카콜라 회사 내에 만들었습니다. 구라에다 뻥을 덧씌운 형국이지요. 그 직후에 ‘두 명의 임원 비행기 동승금지 운운’하는 규약도 만들어서 조항에 넣었답니다.



하지만 우드러프가 매스컴을 상대로 비밀 성분의 특별함을 한참 떠벌리고 있을 때 한편에선, 코카콜라 회사에선 원액을 만들어낼 수 있는 수많은 기술자들을 직접 고용해 그 주둥아리들을 철저히 함구시켜야 했지요. 애초부터 졸라 많은 사람들이 그 제조법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비밀 원료와 관련된 공식적인 내규와 그 전썰적인 이야기는 코카콜라 회사에 의해 매스컴과 대중을 타겟으로 과장하고 조작된 것이었고, 그게 아직도 효력 발휘 중인 셈이죠.

그러니 지금의 상황도 1920년 대 어니스트 우드러프 (좌식!! 이름부터 뻥이네…) 시절과 마찬가지입니다.


원액 제조 공정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원료의 정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넘의 썰 때문에 콜라원액을 미국의 비밀공장에서만 만들고, 한국에서는 물 타고 보틀링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도 순전히 뻥이라는 얘깁니다.

이미 1974년 3월부터 한국 코카콜라 안양공장에서 원액을 전량 생산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아름답지만 또 추하기도 하지요.

전썰은 뻥이었고 1993년 애틀란타에서 Mark Pendergrast가 쓴 책, <For God, Country and Coca-Cola, The Unauthorized History of the Great American Soft Drink and the Company that Makes It>에서, 코카콜라의 창조자인 존 S. 팸버튼 박사의 기록을 통해 확인한 코카콜라 원료 배합의 비밀을 그대로 까발렸습니다.


그 후 신문에도 그 책의 내용대로 만든 원액이, 실험실에서 분석한 코카콜라 성분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기사도 실렸습니다. 그 기사의 리드는 <After 125 yrs. secret Coke formula is out>, Times News Network에서 ‘Mystery was Marketing Tool’이라는 부제로 대문짝만하게 실렸지요.


코카콜라 측에선 정확하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그 제조법은 그 책뿐만 아니라 지금은 인터넷에도 둥둥 떠다니고 있습니다.


콜라의 중요 성분이지만 마약 성분이기 때문에 입수가 불가능한 코카잎이 좀 문제인데, 중남미 산지에서 훔쳐서 밀수를 하던지 해야 할 듯… 그냥 사먹는 게 맘 편한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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