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도 언젠가 죽는다는 걸 잊지 말라’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이다.

스티브 잡스는 스탠포드대학 졸업 축사에서, 암 투병을 통해 얻은 죽음과 삶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을 생생히 전했다. 그는 연설에서 우리는 곧 죽는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하며, 죽음은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하는 최종 목적지라고 말했다.

 

“제가 17세 때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매일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간다면, 당신이 분명히 올바르게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타인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지금부터 ‘여러분 인생에서 단 하루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24시간 뒤에 죽는다고 생각하면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남은 시간을 보내야 할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은 시간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철학 하면 왠지 따분하고 재미없게 느껴지곤 하는데,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는 우리가 왜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어떤 이는 철학 이야기에 ‘공자, 소크라테스가 밥 먹여 주냐?’라며 쓸모 없는 학문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철학은 매우 유용한 학문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철학을 소홀히 대하는 큰 이유는 당장 삶에 적용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철학을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은 최대한 빨리 핵심만 공부해서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

사유과정은 생략한 채 철학자들이 남긴 명제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결론만으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그들이 세상을 관찰하는 과정, 사유의 태도 등을 함께 따라가다 보면 삶에 큰 자극이 될만한 신선한 가르침을 얻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생각의 깊이를 넓혀주고 삶의 무기로 삼을 수 있는 철학 사상 3가지만 살펴보자.

 

1) 타불라 라사 Tabula rasa

 

이것은 라틴어로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석판’이란 뜻이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인 존 로크는 사람의 심성은 태어날 때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석판, 즉 타불라 라사와 같다고 생각했다.

 

당시 이 개념은 세습 왕권과 귀족 신분의 정당성을 뒤흔드는 기폭제가 됐다. 지금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고관이지만, 로크(1632~1704)가 살던 당시 사회에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누구나 태어날 때 상태가 ‘백지’라는 것은 인간에게 타고난 우열이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의 소양은 모두 태어난 후에 어떠한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고, 인간은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로크는 현대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를 빼놓고 자유민주주의를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절대왕정 시대에 정부의 구성과 한계에 대해 뚜렷한 금을 긋고, 보다 확장된 대중의 권리를 천명한 그의 정치이론은 이후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결국 로크의 이론은 영국의 명예혁명을 성공시켰고,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 독립선언서의 밑그림이 되었다.

 

존 로크는 ‘타고난 능력이란 없다. 경험을 통해 인간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처럼 우리가 ‘경험과 학습에 의해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면 인생의 어느 시점에나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수명이 100세에 이르는 시대, ‘다시 새롭게 배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특히 오늘날처럼 기술의 발달이 급진적인 사회에서는 한번 배운 지식이 금세 진부해지고 마는 경향이 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자신의 경험을 초기화시키고 다시 백지 상태로 돌릴 수 있느냐가 인생 2막의 명제가 될 것이다.

 

 

2) 타자의 얼굴

 

철학에서는 남을 타자(他者)라고 부른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무엇보다 ‘타자’의 중요성과 가능성에 대해 논한 철학자다. 그가 말하는 ‘타자’는 ‘소통이 안 되는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에서 서먹한 상대, 소통이 안 되는 타자가 왜 중요한 것일까? 이에 대해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답한다.

“타자는 깨달음의 계기다”

 

그는 자기중심적 전체성을 깨뜨리고 타자의 무한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들은 자기 시점에서 세상을 이해한다 해도 그것은 타자에 의한 세상의 이해와는 다르다. 물론 타자의 견해를 ‘네 생각은 틀렸어’라며 부정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인류에게 일어난 비극의 대부분이 자신은 옳고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는 틀렸다고 단정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나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른 타자를 배움과 깨달음의 계기로 삼는다면, 우리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관점의 가치관을 획득 할 수 있다.

 

일본 역사학자 아베긴야 교수는 안다거나 이해한다는 것은 ‘바뀐다’라는 뜻이라고 말한다. 즉 안다는 것은 그것에 의해 자신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레비나스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와의 관계라 하더라도 얼굴을 마주함으로써 이해의 가능성을 교환하고 이로써 관계성을 파괴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정답인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답이 아닐 수 있다.

그가 말한 ‘타자’의 개념은 오늘날 그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3) Ressentiment

 

철학 책을 보면 ‘르상티망’이란 말이 나온다.

‘약자가 강자에게 품는 질투, 증오, 열등감 등이 뒤섞인 감정’이다. 한마디로 시기심과 질투로 번역할 수 있는데, 르상티망을 잘 관찰하면 비즈니스 기회가 보인다.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를 사례로 살펴보자.

어느 날 굶주린 여유가 잘 익은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포도나무를 보았다. 그 여우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포도송이를 따먹으려고 시도해봤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포도송이는 여우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매달려 있었다.

 

결국 여우는 허탈하게 실망하며 마음을 바꾸었다. 그리곤 중얼거린다. “이 포도는 엄청 신게 분명해. 이런 걸 누가 먹겠어!”라며 가 버렸다.

여우는 손이 닿지 않는 포도에 대한 분한 마음을 ‘저 포도는 엄청 시다’라고 생각을 바꿔 르상티망을 해소해 버렸다.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에 따르면 열등감에 사로잡힌 개인은 르상티망을 해소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하나는 르상티망의 원인이 된 가치기준에 순응하고 복종함으로써 그 감정을 해소한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르상티망의 원인이 된 가치판단을 뒤바꾸면서 그 감정을 해소한다.

 

쉽게 말해 누군가는 명품가방을 구매함으로써 르상티망을 해소하는가 하면,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가치관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을 바꿈으로써 르상티망을 해소하는 것이다.

매년 새로운 상품을 출시하는 기업들은 철저히 르상티망을 이용한다. 인간의 마음을 탐구함으로써 사업을 지속한다고 볼 수 있다.

 

기업이 르상티망을 관찰하여 돈을 벌 듯, 소비자 역시 자신이 무언가를 원할 때 그 욕구가 ‘진짜 자신’의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타인이 불러일으킨 르상티망에 의해 가동된 것인지를 분별해 볼 필요가 있다.

 

끝으로 김형철 연세대 철학과 교수는 <철학의 힘>이란 책에서,

‘철학의 힘은 현실에서 힘이 없다는 사실에서부터 나온다’라고 했다.

아무리 철학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해도 바로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권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는 ‘철학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바로 스스로 생각하는 힘입니다. 무엇이 쓸모 있고 없는지는 우리 스스로가 판단하는 것입니다. 철학만 공부하면 세상을 모르게 되는 건 맞습니다. 그런데 철학을 공부하고 다른 지식을 접붙이면 세상을 확연히 볼 수 있게 됩니다.

철학은 숲을 보는 학문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지혜가 더 우러나오는 그런 학문입니다.”

야마구치 슈 저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북올림>을 참고

지방대 시간강사가 그만두고 대리기사를 시작했다. 카카오드라이버를 깔고 밤마다 길거리에 나간다. 가족 생계가 달린 대리기사 일은 생각보다 고되다.
무엇보다도 누군가의 대리가 되면서 그는 3가지 자유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먼저 몸의 자유가 사라진다.
함부로 차 안 의자 위치를 바꿀 수 없다. 백미러가 잘 안 보여도 그대로 두어야 한다. 차 주인이 자기 몸에 맞춰 놓은 것들이니까…

말의 자유가 사라진다.
손님에게 먼저 말을 거는 대리기사는 거의 없다. 대화를 하더라도 주로 ‘네, 맞습니다’의 대답만 하게 된다. 손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한다.

끝으로 생각이 없어진다.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대신, 영혼 없이 운전만 하게 된다.

그 남자는 생각한다.
‘타인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 게 사회의 축소판과 같은 거구나. 대리기사가 아니어도 사회 곳곳에는 3가지 자유를 뺏긴 채 일하고 행동하는 존재들이 참 많구나.’

김민섭 작가의 <대리사회>를 보면, ‘을’로 살아가며 주체성을 잃어버리는 노동자, 학생 그리고 우리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대학교에도 대리기사들이 있다. 학생들이다.
우리나라 학생들 보고 질문하지 않는 아이들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건 학생들 문제이기보다는 교수의 문제에 더 가깝다.
저자는 학부생이나 대학원생들이 가장 먼저 신경 쓰는 것은, 해당 교수가 가지고 있는 입장이라고 말한다.

학점을 받거나 지도를 받아야 하는 ‘을’로서, 교수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 되니까… 토론이 가능하려면 교수가 자신의 입장을 숨기거나, 자신의 의견에 반대해도 불이익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꽤 많은 교수가 얼굴을 붉히며 면박과 불이익을 준다고 한다.

교수가 강의실의 유일한 주체가 되어 말을 쏟아내는 순간, 그 안의 학생들은 타인의 운전석에 앉은 대리기사가 되어버린다.
스스로 사유하기를 멈추고,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주제가 나와도 침묵하는 것이다.

저자는 회사에도 대리기사가 많다고 말한다.
부장이나 팀장은 언제나 자유롭게 회의 안건을 내고 소통하자고 말하지만, 수용 가능한 범위가 제한되어 있음은 눈치껏 알아야 한다.

부하 직원은 직장 상사에게 아이디어를 내지 않고, 학생은 교수의 의도에서 벗어난 답을 제출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을’의 공간에서 순응하는 방법을 배워왔다. 그렇게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직의 문화와 규칙이 나쁜 건 아니다. 어느 정도는 규칙이 있어야 조직이 굴러갈 테니까. 문제는 그 규칙과 문화가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으로 변할 때다.
‘원래 우리는 이래. 옛날부터 이렇게 해왔어. 왜 너만 불만이야?’라는 말로, 질서와 효율을 위해 존재했던 규칙들이 조직 보호와 착취의 목적으로 사용된다.

 


책은 ‘대리사회의 괴물은 통제에 익숙해진 대리인간을 원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틀을 만들고 스스로 사유해야 한다. 끊임없이 불편해하고 의심하고 질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요된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 믿으며, 타인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가장 무서운 것은, ‘불합리하고 규칙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자신은 옳은 것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은 조직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혹은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꽤나 좌절스럽다.


저자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책의 글을 쓰면서, 대학교의 비합리적인 시스템과 조교나 시간강사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고발했는데, 이때 자신을 가장 좌절시켰던 것은 대학이라는 ‘갑’이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을’이었다고 고백한다.

조금은 자신을 지지해줄 것이라 믿었던 동료들이,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 우리가 받을 피해는 생각해봤냐? 너만 그렇게 힘드냐? 우리도 다 겪었던 일이다.’라는 반응을 보였을 때 저자는 무너졌다고 말한다.
‘을’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갑’의 충실한 ‘을’들이다. 순응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게 된 ‘을’들이다.

‘을’은 어떻게 주체성을 얻을 수 있을까?
책은 사람의 배려와 정에 호소한다. 대리기사를 하면서 저자는 타인을 주체로서 일으켜 세우는 이들을 만났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선생님의 차라고 생각하고 운전해주십시오.’라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기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의견을 물어봐 주었다고 한다.

오늘만 한정특가!


서로가 각각의 위치에서 그 사람의 주체성을 인정해주자.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주체성을 끌어올려주자. 상대방을 서비스의 수단이 아닌, 사람으로 바라보고 정을 주고받자.

‘을’끼리 공감해주자. ‘을’끼리 싸우지 말자. 그리고 부당한 일을 겪으면 힘을 보태주자.
아마 이런 것이 저자가 직접 대리기사를 뛰면서 얻어낸 이 사회의 희망일 것이다.

김민섭 저 <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책그림>을 참고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유학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책이 있다.

유학의 거장인 퇴계 이황은 서른 무렵 이 책을 접한 후, 마지막 순간까지 매일 새벽마다 읽었다 한다.


실학의 거장 다산 정약용 역시 18년간의 유배생활 중 방대한 학문체계를 정리하면서,

‘그 동안의 공부를 이 책으로 매듭짓고자 한다’라고 썼다. 그 정도로 이 책은 조선의 선비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책이었다.


책이 도대체 그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길래, 조선의 대학자들이 그토록 빠져들었던 것일까?

그 책의 이름은 바로 ‘심경(心經)'이다.

심경은 주자의 제자였던 송나라 학자 진덕수(眞德秀)가 편찬한 책으로, ‘마음’에 대해 다룬 유교 경전이다.




사서삼경과 함께 주희, 주돈이, 정이천 같은 유학자의 글 중에서, 마음공부에 관한 내용을 가려 뽑아 만들었다.

사서 :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삼경 : 시경, 서경, 주역(역경)


책이 처음 나올 당시 중국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퇴계 이황이 이 책의 가치를 알아보고 적극 연구하면서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후 ‘심경’과 그 주석서인 ‘심경부주’는, ‘인간의 마음이해’를 위한 성리학자들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논어, 맹자, 중용처럼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다른 동양고전들에 비해, ‘심경’은 우리가 왜 잘 알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철저히 잊힌 책이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급격한 재건의 과정을 지나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숨가쁜 역사를 만들고 겪어왔다. 그런 현실 속에서 어쩌면 ‘마음’을 돌보는 일은 배부른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마음을 지켜내는 것에 대한 깊은 사유보다는,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치열한 쟁취의 과정을 겪은 지금 우리는 원하는 대부분을 얻게 되었지만, 급하게 쌓아 올린 만큼 우리 안의 문화는 다양한 결이 뒤섞여 분열적인 모습을 나타내기 일쑤다.

마음공부에 소홀해진 오늘날 현대인들은, 마음을 어딘가에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은 저 알아서 가는 것이고, 문제는 대체로 ‘밖’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공부를 이야기하면 언어유희 내지는 사치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결과 모두가 자신을 지킨다는 명분을 앞세워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 버렸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분노하고 거침없이 냉소를 날린다. 실익은 챙길지 모르지만, 언제부터인지 우리의 내면은 거칠고 메마르게 되었다.


맹자 고자장구(告子章句) 상(上) 편에는 이런 글이 실려있다.

‘사람들은 닭이나 개를 잃어버리면 곧 찾을 줄 알지만, 잃어버린 마음을 찾을 줄 모른다. 학문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데 있다.’


정작 가장 소중한 자신의 마음을 잃고서는 찾을 줄을 모른다. 심지어 그것을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마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곧 자아를 상실한 것과 같다. 마음은 곧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맹자는 잃어버린 인의(仁義)의 마음을 찾아 양심을 회복해야 한다며, 이것이 진정 학문의 길이라고 말했다.

다산 정약용 역시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삶의 주제도 바로 마음이었다. 다산은 정조 임금과 함께 조선 후기 개혁을 이끌었지만, 18년 간의 유배생활을 겪어야 했다.


유배 초기에는 받아주는 데가 없어, 가난한 떡장수의 좁은 집에서 뒷방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고난의 시기에 다산은 심경에 심취했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자신을 위한 마지막 공부를 마음을 다스리는 ‘심경’으로 맺고자 한다며 ‘능히 실천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결국 다산은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고난을 이겨내는 힘이며, 학문의 끝이라고 말한다.


공자는 마음이란 스스로 붙잡지 않으면 곧 어디로인지 모르게 가버린다고 했다. 마음은 이목구비의 욕망과 희로애락의 감정으로 인해 끊임없이 유혹을 받는다. 만약 단 한 순간이라도 마음을 놓아버리게 되면 천리 바깥으로 달아나 회복이 어려워진다.


현대문명이 안고 있는 문제의 대부분은 물질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것들을 다루는 인간의 마음이 어떤가에 달린 문제라고 한다.

욕심에 사로잡혀 인간의 양심을 잃어가는 지금,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번 살펴볼 때다.


조윤제 저 <다산의 마지막 공부 : 마음을 지켜낸다는 것> <BetterLife>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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