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하며 20년가량 제법 오랫동안 사용하던 방법인데, 잘 정리된 내용이 있어 여기서 요약해 봅니다. 제 기억으로 원 출처는 스티븐 코비의 <7가지 습관>으로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데, 맞는지는 확신할 수가 없네요.


우리나라에서는 '2상한 사고법'으로 별칭을 붙여서, 긴급도와 중요도를 각각 x와 y 축으로 잡고, 백지 중간에 십자선을 긋고 일을 그때그때 정리하며 사용했었지요. 그 분류가 가끔 헷갈려서, 결국은 '이상한 사고법'(?)이 돼버린 경우도 비일비재했었습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일이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해요."

그럼 저는 이렇게 답해줍니다.

"일단 너무 자책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으면 해요. 과중한 업무에 짓눌리다 보면 누구나 그럴 수 있으니까요."


저는 이 방법을 추천합니다.

무작정 일을 시작하는 것을 멈추고, 해야 할 일들을 '리스트'로 만들기... 리스트를 만드는 건, 본격적인 요리에 앞서 식재료를 다듬는 과정과 같거든요. 할 일을 다 적었다면 <4가지 카테고리>로 나눕니다.


1) 중요하고도 시급한 일

빨리 넘겨줘야 다음 사람이 남은 과정을 처리해서 마감 시한을 맞출 수 있고, 제때 끝내지 못하면 큰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일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한마디로 긴급한 상황입니다. 이런 일은 머뭇거릴 여유가 없습니다. '즉시' 해결해야 합니다.


비가 온다면 우산을 쓰고 뛰어가야 하고, 막차가 끊겼다면 택시를 타고 달려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해야 하니까요.


2) 중요하지만 시급하지 않은 일

독서, 운동, 글쓰기, 외국어 공부 등의 일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잠을 줄이고 시간을 쪼개 아등바등해야 겨우 해낼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중요하면서도 시급한 일에 치이다 보면, 이런 일들을 왜 해야 하나 싶은 생각마저 들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싶다면, 미래지향적이 되어야 합니다. 중요하지만 시급하지 않은 일들이야말로 미래를 구성하는 결정적인 것들이니까요. 시간이 축적되면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막강한 '경쟁력'이 됩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힘들어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3) 중요하지 않지만 시급한 일

예를 들어, 월요일까지 끝내야 할 보고서가 있는데, 시작도 못한 채 금요일이 되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 주 일요일은 친한 친구의 결혼식 날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결혼식은 그날에만 이뤄지는 이벤트라서 미룰 수 없는 시급한 일에 속합니다.


하지만 내가 결혼식의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지요. 이럴 때는 그 지인에게 다른 방법으로 갚는다고 생각하며 결혼식 참석을 포기해야 합니다. 결혼식, 동창 모임 같은 곳에 모두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참석하지 않는다고 해서 큰일 나는 것 아닙니다. 선택한 것에 집중하고 선택하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것, 이렇게 선택과 포기가 조화를 이루어야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4) 중요하지도 시급하지도 않은 일

사실 우리는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일들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곤 합니다. 잠깐 TV를 켰는데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고, 카톡에 답장을 했는데 30분이 자나가 있고, 이런 일은 흔히 발생합니다. 이런 습관을 고치기 위해서는, 무의식적으로 허비하는 자투리 시간을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모든 복잡한 것의 답은 의외로 간단할 때가 많지요. '우선순위 리스트'를 만들어 보세요.

▶ 중요하고도 시급한 일

▶ 중요하지만 시급하지 않은 일

▶ 중요하지 않지만 시급한 일

▶ 중요하지도 시급하지도 않은 일

이 네 가지를 정리해보는 것만으로도,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던 머릿속이 조금은 정리될 것입니다.


삶을 바꾸는 10분 자기경영
국내도서
저자 : 김형환
출판 : 책이있는풍경 2015.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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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환의 <삶을 바꾸는 10분 자기경영>을 참고하였습니다.



웹스터 사전에서 '지혜'는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첫째, 지식 

둘째, 통찰 

셋째, 판단 또는 분별력 


이렇게 보면 지혜롭다는 것이 '똑똑하다'는 것과는 다른 게 더 많은 모양입니다.ㅎㅎ

지혜를 이루는 기둥 다섯 개를 짚어보겠습니다. (<이 방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 Thomas Gilovich & Lee Ross 저, 이경식 역)


내용에는 별로 새로운 것 없이 진부할 수도 있습니다. 늘 그렇듯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놓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으니, 다시 한번 복기하는 기분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객관성을 의심하라 


객관성은 환상이다. 모두 공감하세요?

어쩌면 객관적이라는 말처럼 주관적인 것도 없을 테니까요.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나는 객관적이라 생각하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고 여깁니다. 자신은 특별해서 남들보다 더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사물과 현상을 꿰뚫고 있다고 주장하지요.


정치적 신념이나 지식도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본인은 매우 적절하게 현실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 이 지점에서 예외일 수 없지요.


그리고 다른 이들도 사물이나 상황을 자기와 마찬가지로 볼 것이라고 가정하고, 그래서 자신은 남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은 누구나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지요. 이런 논리는 그 자신에게는 합리적이라 볼 수 있죠.


그러나 이런 게 '허위합의 효과'를 만들어 내기도 하지요. 자신의 믿음, 견해 그리고 행동이 실제보다 더 많이 합의 내용과 일치한다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식의 생각은 비일비재하고, 부정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질까요? 결국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시각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겠지요. 여러 사실은 여러 환경과 특이한 조합을 하면서, 새로운 시각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실험에서도 이미 검증된 내용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1980년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럴 진대, 상대방의 눈으로 바라보고 생각해보라고 권유해봐야 별로 소용이 없다는 얘기겠습니다.





객관성을 확보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우선 '편향은 나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편향은 언제나 나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견해를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습니다. 말로 하면 간단하지만, 인정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지요. 심지어 자신을 반성하며 돌아볼 때조차도, 자기 안의 편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대부분은 이런 함정에 빠질지라도, 아무튼 끊임없이 노력해야겠지요.


사람들은 상대방과 의견 불일치가 가장 클 때, 상대방의 견해를 특히 가혹하게 평가하지요. 자신은 맞고 상대방은 틀리다면서 자기 견해의 합리성을 특별히 높게 평가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전에는 양면이 있다'는 것을 항상 상기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기대나 욕망, 경험을 배제하고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할 것 같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나마 가능한 것은 자기 관점이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틀렸고, 다른 사람이 맞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2) 상황을 이용하라


상황이 발휘하는 힘이 있다네요.

결론적으로, 우리는 상황의 작은 변화에 큰 영향을 받는 것을 이용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Kurt Lewin의 '초점의 아주 소박한 변화'라는 발상이 있습니다. 예컨대 대부분의 CEO는 동기부여 컨설턴트를 초빙해서 직원들이 주도적으로 일하도록 독려합니다. 세상에 동기부여 강사가 그리 많은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동기부여 자체가 실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일례로 권장하는 행동과 권장하지 않는 행동이 있다고 가정하면, 이런 경우 해법은 아주 간단하죠. 권장하는 행동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도록 만들고, 권장하지 않는 행동은 쉽게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Opt-In 설계와 Opt-Out 설계는 경우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이쯤에서 넛지 Nudge를 떠올리셨다면, 맞습니다. 같은 개념입니다. 다이어트도 마찬가지죠. 다이어트를 위해서는 '무엇을 하지 않겠다'는 자제력을 발휘해야 하지만, 다이어트를 쉽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보다 쉽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도 쉽게 할 수 있다.

아무리 큰일이라도 '문간에 발 들여놓기 기법' Foot in the Door Technique 를 쓰면 쉬워진답니다. 크고 어려운 일이라도,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 훨씬 수월해진다는 얘기지요. 어떤 일이라도 일단 시작해 보는 것, 발을 문간에 들여놓으면 엄청난 일도 보다 쉽게 해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3) 언어를 이용하라


언어 자체가 지혜의 바탕이지요. 누구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늘 잊고 사는 것이 '언어의 힘' 같습니다.


동일한 실험의 심리게임을 '공동체 게임' 그리고 '월스트리트 게임'으로 각각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그 명칭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공동체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서로 협력하는 게임이라고 인식했고, '월스트리트 게임'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냉혹하기 짝이 없는 경쟁 사회를 상상하며 게임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 기업에서 팀의 명칭만 바꿔도 창의력이 향상됐다는 얘기가 많았지요.


언어가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바로 주관적인 해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생각과 달리 모든 상황에서 일관된 행동을 하지는 않습니다. 누가 봐도 객관적 환경에서도 주관적으로 해석하며 반응하지요. 이런 모순은 우리가 생활하는 전 영역에 나타납니다.


그 모든 환경에서 우리는 주어진 수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건 수용하지만, 손해가 발생하는 건 숨깁니다. 소득의 20%를 저축할지를 물을 때와, 소득의 80%로 생활할 것인지 질문하면, 두 경우 사람들의 대답은 달라집니다.


뻔히 같은 얘기인데도, 지방이 20%인 고기보다는 살코기가 80%인 고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부정적인 정보에 가중치를 부여하기 때문인데, 이런 언어적 행동 특성을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4) 행동은 정신을 지배한다


행동이 정신을 지배하는 원리는 무엇인가? 정신이 행동을 지배하는 것으로 알고 계셨다면, 다른 측면도 있다는 것을 한번 생각하시라는 의미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심리학의 개척자 William James. 100년도 넘은 얘기지만, 그는 아주 독특한 주장을 했습니다. '사람이 어떤 감정을 경험하는 것은, 신체가 외부 사건에 반응하는 경험이다'라고 했지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어떤 감정을 경험하고, 그 감정에 따라 반응한다'라는 말과 상충하는 개념입니다.

'사람은 울기 때문에 슬픔을 느끼고, 무언가를 휘두르기 때문에 분노를 느낀다'는 얘기인데, 좌우간 그때부터 행동과 정신에 대한 연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답니다.


지금은 두 가지 다른 이론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a) 자기지각 이론 (Self-Perception Theory) : 성찰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내면적인 단서들이 부족할 때, 우리는 자기 행동과 주변 환경을 바탕으로 자신의 믿음과 우선순위를 추론한다.

가령 누군가 이태리 음식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이태리 식당에 갔던 경험을 떠올려서 추론한다는 것입니다.


b) 페스팅거 이론 (Festinger Theory) : 누구나 자기의 행동, 믿음, 가치관과 우선순위의 불일치를 해소한다. 그러니까 부조화를 줄이는 방식이 작동한다는 뜻인데, 이른 바 '인지 부조화'를 줄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이, 과식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칭합니다.


결론은, 우리의 행동은 정신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결정이 내려지면 합리화는 시작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도록 심리적으로 강요받습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사실이지요. 부모는 자녀 양육에 쏟는 모든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관련된 노력을 이상화합니다. 자녀를 기르는 것은 보람되고 기쁜 일이지만, 어떤 것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은 그 일을 높이 평가하도록 강요받는 것은 사실이지요. 때로는 그 일이 그렇게 행복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구매한 제품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조립식 가구처럼 구매한 후 추가로 자기 노력을 들여야 하는 제품에 더 애착을 갖는다지요? 그렇듯이 같은 제품이라도 더 비싼 돈을 주고 산 물건을, 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도 같은 경우지요. '비싼 만큼 값을 한다'는 인식도 한몫하는 걸까요?


합리화를 알아차려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합리화할 때 알아차립니다. 쉽지 않은 일인데, 한번 거꾸로 생각해 보면 됩니다. 다른 사람이 똑같은 합리화를 할 때, 자신은 어떻게 반응할지 스스로에게 되물어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5) 확증편향을 극복하라


특히 기업의 관리자들께서는 주의 깊게 읽으셔야 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신뢰하는가?

체리피킹의 오류 :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나 자료만을 선택적으로 제시하는 오류를 말합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예로 들어서, 과학적인 원리를 입증하려는 학자들이 자주 빠지는 오류입니다.

이념과 선입견은 어떤 것을 잘 볼 수 있도록 렌즈 역할도 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들을 걸러버리는 필터 역할도 합니다.


이성이냐 직관이냐

어떤 사람들은 직관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직관적인 인상은 순간적인 정보만을 바탕으로 하지요. 따라서 이 정보가 믿어도 되는지의 면밀한 검토 없이, 불완전하거나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하지 않습니다. 즉 이성적인 생각이 관여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직관을 믿어야 할 때와 이성을 믿어야 할 때를 구분해야 하는데, 이 구분이 여전히 쉽지 않지요.


확증편향 (Confirmation Bias)

확증편향이란 것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오류를 피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령 신제품을 출시할 때 시장에서 환영받을 조짐을 찾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을 조짐을 찾는 것은 좀 덜 자연스럽고,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이 늘 그렇듯이 어떤 사실을 지지하는 정보는 항상 중심에 놓고, 부정하는 정보는 제외해 버립니다. 이런 과정에서 체리피킹과 이성, 직관의 오류가 모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확증편향을 극복할 수 있는가? 할 수는 있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악마의 대변인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어떤 사안에 대해 의도적으로 반대 의견을 내도록 하는 현명한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널리 사용되는 발상은 아닙니다. 기업이든 종교집단이든 악마의 대변인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보이는 것과 다르다는 인식을 해야 합니다. 일단 의심해 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떤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면, 그 정보가 적절한 것인지 잘 따져보아야 합니다. 쉽게 저장된 정보는 오류를 포함할 수 있으니,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정보를 받아들이기 전에 그 판단부터 해봐야지요.


다원적 무지를 극복해야 합니다.

기업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인데, 불확실한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는 대로 행동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것을 '집단적 무지'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회의 때 많이 발견할 수 있는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신의 생각을 말해 봅시다'의 방법이 있지만, 이렇게 하면 소수 의견은 언제나 묻혀버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전체 의견을 꼭 들어야 할 때에는, 무기명으로 메모를 하여 제출하는 것이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회의 방법만 바꿔도 획일적인 생각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식은 언제나 나에게 좋은 정보는 수용하고, 나쁜 정보는 제외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쉬운 내용인 것 같지만, 의외로 읽기가 쉽지 않은 책이군요. 그리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내용인 것 같지만,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시 오류의 함정에 빠지곤 합니다.


책 <이 방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 The Wisest One in the Room이었습니다.



자주 쓰이는 말 '팩트폭행, 팩트폭력' =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팩트, 즉 모두가 인정할 만한 사실을 제시하며 잘못된 점을 꼬집어 설명하는 행위


폭행, 폭력이라 부르는 만큼, 때로는 상대에게 아프게 타격을 주기도 합니다. 맞는 말이기 때문에 딱히 반박할 수도 없지요.


이것의 시작은 엉터리 선동과 여론 조작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언론의 기사나 시국을 시원하게 꼬집고, 사람들에게 통쾌함과 웃음을 선사했지요. 조금은 긍정적인 의미로 일상생활이나 SNS에까지 많이 쓰이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외국에서 'Stop Using Facts!'라는 말이 먼저 유행되었습니다. 팩트폭행은 인터넷 여론의 자정 작용을 도와줍니다. 일부 정치인의 몰상식과 무능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에 '사이다 팩트폭격기'로 불리며 속을 후련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팩트폭행이라는 글이나 덧글을 보면, 가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그저 말로 남을 헐뜯고 깎아내리는 단순한 언어폭력마저도, 팩트를 제시했다는 것만으로 팩트폭행으로 둔갑하기 때문입니다.


폭행을 가한 가해자들이 팩트폭행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서, 오히려 자신은 사실만을 말하는 팩트폭격기(?)라며 의기양양해 합니다. 인터넷에서는 팩트폭행의 문제가 더 빈번하고 심각합니다. 오프라인과 달리 온라인에서는, 말이 관계를 쌓기 위한 도구가 아닌 대결의 도구가 되기 쉽습니다.


서로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 그리고 다시 안 봐도 될 수 있는 상황은 상대방의 기분을 고려할 필요가 없게 만들고, 앞에서는 하지 못할 말들을 거리낌 없이 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말은 도구로만 행세하고, 그 행위는 지식 자랑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팩트폭행은 말 그대로 사실만을 말하는 건데, 뭐가 문제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속에 내포된 2가지 의미를 살펴보죠.


1) '가르치기'와 '네가 틀렸어'

"그거 읽어본 적은 있냐? 가서 논문하고 책부터 좀 읽어보고 와라."

"해외서 몇 년 살아봐서 아는데, 괜히 아는 척하지 마라."

"뭣도 모르면서 글 쓰고 있네."


팩트를 제시한 것 같은데, '토론'이 아닌 '가르치기'가 됐군요.

원하지 않는 가르침은 상대방을 나보다 낮은 존재로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결국은 네가 틀렸으니, 내가 가르쳐주겠다는 의도지요. 가르치는 것은 오직 상대방이 가르침을 원할 때 뿐입니다. 원하지 않는 가르침은 조언이 아닌 '폭행이나 폭력'이기 쉽지요.


2) 인신공격

"꼭 머리 나쁜 애들이 저런 말하더라."

"애인도 없이 집에 처박혀 있는 애들이 아는 척한다."

"사회문제에 관심도 없는 애들이 있어 보이려고 덧글 쓰지."


우리는 가끔 상대방의 의견이 잘못된 경우, 그 의견을 비판하지 않고 상대방을 비난합니다. 상대방이 무식하고 몰상식하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의견이 나온다는 '인신공격'으로 연결됩니다.



그렇지만, 그의 의견이 틀렸다고 해서 그가 부족한 사람은 아닐 겁니다. 우리 모두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선동에 취약하고 공부도 부족하지요. 누구나 처음부터 팩트를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가끔은 팩트라는 어떤 사실이 뒤바뀌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잘못된 주장을 한다면 그 주장을 비판해야지요. '네가 틀렸어'가 아니라, '네 의견이 틀렸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팩트폭행은 무엇일까요? 과연 올바른 팩트폭행이란 게 존재나 할까요?

토론이나 언쟁의 목적은, 자신이 올바르다 생각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제시해 상대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내 주장에 수긍하고, 내 논리를 이해하고, 내 방향에 공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럴 때 팩트폭행을 하면서 상대를 깎아내리고, 무시하고, 비난하면, 상대방은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보호하려 하지요. 자신의 주장과 자존심을 동일시하면서 반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팩트폭행은 도덕성의 문제를 넘어서,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자제 되어야 한다고 보입니다.


반론 할 때 내 목적을 먼저 생각해 봅시다.

비웃는 말투, 문제를 벗어난 인신공격, 남을 가르치려는 태도가 내 목적에 부합하나요? 내 목적이 그들을 낮춤으로써 나를 높이는 것인가요?


각자의 삶에서 개개인이 추구하는 가치나 생각이 일치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상대를 팩트로 폭행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걸까요?


온라인상에서 팩트폭행이라는 명목하에 남을 깎아내리는 것이 영웅시 된다면, 일상에서조차 말로 남을 폭행하는 사태가 더 빈번해지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상대방에게 굴욕감을 주기 위해 팩트를 남발할까 두려워집니다.


팩트라는 것만으로 잘못된 목적이 정당화될까 봐 걱정됩니다. 말이 가진 힘은 굉장히 커서, 말을 어떻게 하느냐가 곧 자신을 규정하게 됩니다.

말은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은 인격이 됩니다.


우리가 '팩트폭행'을 시원하다라고만 생각하며 당연시 여기게 된다면, 그다음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 모두 다시 한번 생각해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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