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 세계 2위 경제대국 ≠ 민주주의 국가
중국은 오직 중국공산당만이 집권하는 1당 독재국가다. 공산당이 국가 위에 존재한다.
최고 권력자 시진핑, 그는 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당에서도 최고 지위를 가지며,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원수직인 국가주석이기도 하다.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하는 부패지수를 살펴보면, 중국의 부패지수는 2018년 전세계 87위로 정말 형편없는 실정이다. 그리고 언론자유지수도 176위로, 최악의 수준이다.
경제적으로는 성장했지만, 여전히 부패가 만연하고 표현의 자유도 없다.

그럼에도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1949년 이후 70년 넘게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어떻게 그런 공산당이 세계에서 제일 사람이 많은 나라를 지배할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공산당의 과거 행적을 살펴봐도 중국 인민들이 정권의 어떤 정당성에 근거해서 지지하는지 의문이 든다.

보통은 정권의 정당성이 없으면, 그 정권은 오래갈 수 없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진리이다.
책 <하버드 중국 특강>에서 하버드대 중국 정치 전문가 엘리자베스 페리 Elizabeth J. Perry 교수는, 중국공산정권의 정당성에 대해 분석했다.

 


막스 베버 Max Weber (1864~1920)는 모든 권력은 정통성을 확보해야 지속적일 수 있고, 그런 권력이 합법적 기구들을 통해 강제력을 가지고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 받는다고 보았다.
막스 베버는 지배의 정통성을 획득하는 방법으로 3가지를 들었다.

1) 전통적 권위
원래 그래왔으니까라는 역사적 축적이 바로 그것이다. 관례적으로 권위를 가진다. 오랜 시일에 걸친 전통과 관습을 토대로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왕정시대의 중국 황제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무너졌고, 중국의 절대 군주체제는 사라졌다.

2) 합리적-법적 권위
만들어진 법에 대한 믿음과 절차를 바탕으로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을 뜻한다. 민주주의 사회의 체제 정당성이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3) 카리스마적 권위
특정 인물의 신성성, 영웅성을 이용하여 권위를 얻는 방법이다. 카리스마적 권위는 유지가 어렵고 카리스마가 존재할 때, 위의 2가지 형태의 권위로 전환시켜야 한다.
과거 마오쩌둥(모택동)은 카리스마적 권위가 있었다고 본다. 뛰어난 군사전략가이자 이론가로서 혁명을 성공시켰고, 천하를 얻은 인물로 아직도 많은 중국인들은 마오를 숭배하고 있다.

 


그렇지만 마오쩌둥은 40여년 전에 죽었다. 카리스마적 권위는 무너졌고, 소련의 공산체제가 무너진 것도 25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중국공산당은 여전히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심지어 중국 시민들은 당에 대한 지지가 대단하며, 공산당을 비판하는 곳에는 네티즌들이 옹호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많은 학자들 또는 중국측 매체에서는, 중국공산당은 그들이 일궈낸 성과로 인해 인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일 수 없다.
비록 중국이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하더라도, 과거 중국 공산당이 주도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등은 정말 크게 실패한 정책이었다.

 


이렇게 성과 자체도 지지부진하다 보니 중국공산당은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역사’를 말한다.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지만, 중국공산당은 일천한 역사를 지닌 정당으로 집권 이후 인민들은 굶주렸다. 중국공산당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시진핑은 3년 전인 2016년 5월 사회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을 모셔다 놓고, ‘중국의 사회주의 관행에 적합한 새로운 분석적 접근법’을 개발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갑작스러운 이론정립 과업에 공산당의 지도력이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이는 지식인들에게 공산당의 통치와 관련한 학술적, 논리적 근거를 만들라는 지시였음에 다름 아니다.

공산당은 이들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고, 지식인들은 공산당을 위해 역사 왜곡 혹은 역사 다시쓰기 작업을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할 것이다.
‘중국은 위대하다. 그런 중국을 공산당이 건국했고, 공산당이 계승한다. 그리고 공산당은 중국을 더욱 위대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과정을 보면 마치 김일성이 황장엽을 통해 주체이론을 만들어 자신을 신격화한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북한은 1930년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결과로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고, 북한의 공산혁명도 이룩할 수 있었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민족사도 날조했다.

그리고 항일정신이 북한 김일성 사상의 뿌리깊은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북한은 일본과 아직 국교를 맺지 않았다. 물론 일본은 맺고자 했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했다.
현재 일본과 국교를 맺지 않은 나라는 북한이 유일하다.

북한은 공산당 역사를 김일성 개인의 투쟁사로, 우리 민족사를 그들의 혁명사상에 따른 혁명사로 날조했다. 그리고 그들의 혁명사상은 이후 정치교육의 필수 내용이 되어 체계화된 주체사상의 기반이 되었다.

한편 싱가포르의 리콴유는 중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중국인은 국가가 이끄는 지도부가 강력해야 평화와 번영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앞으로도 이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을 것이고, 그것은 공산주의 이념보다도 우선시되는 중국인의 신념 체계이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중국을 통일한 성과가 있다고는 하지만, 통일은 이미 청나라 시절에 이루어져 있었다.
중국인들이 분열된 중국을 원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이점 역시 중국공산당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역사’라고 보기는 어렵다.

 


결론적으로, 중국공산당이 중국을 지배할 정당성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중국공산당은 정당성이 필요하다. 중국은 앞으로도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실적을 내든,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지배의 정당성을 갖춰나가려 할 것이다.
<BetterLife>를 참고

富不三代’라는 말이 있다. 부자는 3대를 넘기기 힘들다는 말이다.

1대는 자수성가를 했기 때문에 망할 염려가 없고, 2대는 부모가 재산을 모으는 과정을 지켜봤기 때문에 현상유지는 해나갈 수 있지만, 세상물정 모르고 자란 3대는 관리를 못해 재산을 지키기 쉽지 않다는 뜻이다.

한편으로 ‘빈불삼대’라고 해서 가난도 삼대 안 간다는 말도 있다.


재산을 자식 대에서 지켜내지 못할 수 있음을 경계하고, 하루아침에 빈부가 달라질 수 있으니 겸손하고 초심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준 것이다.




사람들은 부자들에 시기와 질투를 가진다.

특히 노력 없이 물려받아 부자가 된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시기와 질투가 결국 자기 자신의 행복도 방해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도 배운다.


시기와 질투의 감정이 심해지면 사회질서를 무너뜨려 혼란스러운 세상을 만들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옳지 않은 것으로 배우기도 한다.

부를 만들어내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축적한 부를 관리하고 키워나가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경주 최부잣집은 무려 12대에 걸쳐 300년간 부를 이어왔다. 조선후기 내내 최고의 부자로 이름이 자자했고, 서민들에게도 우호적인 부자였다.

경주 최부잣집은 16세기 무관인 최진립부터 시작하여 12대 최준에 이르기까지의 집안을 말한다.


최진립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공을 세운 무관이다. 말년에는 병자호란이 있었고, 남한산성까지 가서 임금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했다. 장군으로써 출세해서 꽤 많은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충절의 무신집안이 어찌 조선시대 부자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을까?


최진립의 아들 최동량은 장군출신 아버지가 물려준 많은 재산으로 큰 땅을 사들인다. 그는 조선을 대표하는 부자가문으로의 변신을 꾀했다.

소작료를 줄였고, 소작인 관리자인 마름을 없애버렸다. 마름은 지주를 대신해서 소작인들을 관리하는 자들인데, 이들이 따로 착복하는 재물도 많았고 소작인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그리고 거름을 쓰는 시비법과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을 적극 도입하여 쌀 수확량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



3대 최국선 때에 이르러서는 최씨 가문만의 독특한 경영이 시작된다. 이미 조선 최고의 부자가문이 되었는데, 어느 불교 승려의 ‘재물은 거름과 같다. 재물을 나누면 세상을 이롭게 하지만, 움켜쥐면 썩는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눔을 실천한다.

흉년이 들면 적극적으로 쌀을 나누어주었고, 소작 수입의 1/3을 빈민구제에 썼다.


그들 가문 12대 300년간 번성의 기초는 바로 가훈에 있었다. 이름하여 ‘최부잣집 육훈’이라고 한다.

원칙이 올바르게 섰을 때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선순환된다. 최부잣집 육훈을 살펴보자.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을 하지 마라.

 → 정치 권력에 휘둘리지 마라.

▶재산은 만 석 이상 모으지 마라.

 → 너무 큰 욕심은 버려라.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 땅값이 떨어질 때 매수하지 않도록 하여, 남의 불행을 기회로 삼는 것을 경계하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 인적 네트워크 구성, 좋은 이미지 유지

▶사방 백 리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사람들이 모여들게 만들고, 안정적인 사회를 구축하려는 노력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간 무명옷을 입게 하라.

 → 절약과 검소함을 몸에 배도록 해서 집안 분위기를 해치는 것을 경계


마름도 두지 않고 소작료로 만석 이상을 거둬들이지 않으니, 땅이 많아질수록 소작료가 줄어드는 효과가 나타났다. 그래서 토지 매물이 나오면 제일 먼저 최부잣집에 가져가게 되고, 좋은 매물을 제일 먼저 손에 쥐게 되었다. 점점 더 부자가 되고 최부잣댁 소작인들 역시 소작료를 덜 내니 서로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가 지나면 회복과 성장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혼돈의 시기에 기회를 잘 잡으면 많이 성공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최씨 부자 역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을 거치면서 자리잡아, 조선 후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부잣집 육훈’이라는 좋은 원칙을 기초로 더욱 번성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부자들 역시 엄청난 격동의 현대사에서 기회를 잘 잡아 성공해왔다.

더 오랜 기간 번성하고자 한다면 기술과 경쟁력도 중요하지만, 최씨 가문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도 필수적일 것이다.


<BetterLife>를 참고



사형 선고를 받은 한 남자가 있었다.

이릉(李陵)이라는 죄 없는 젊은 장수를 변호하다가, 황제의 미움을 산 게 원인이었다. 이릉은 漢나라의 뛰어난 무장으로 보병 5천 명을 거느리고 그 열 배가 넘는 흉노군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화살과 무기는 모두 바닥 났고 흉노군에 투항하고 만다. 이 일로 漢武帝는 매우 진노했다.


황제의 눈치를 살피던 대부분의 신하들은 하나같이 이릉의 일에 침묵했다. 그 와중에 오직 한 사람만이 이릉을 변호하고 나섰다.


‘이릉은 충신입니다. 그의 충절은 이미 수많은 전투에서 증명되었고, 집안 대대로 漢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명문가입니다. 어찌 그가 오랑캐 흉노에게 항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릉은 어쩔 수 없이 거짓 항복을 한 것입니다.’




이릉을 변호하던 그 남자는 결국 옥에 갇히게 되었고, 사형선고까지 받게 된다.

당시의 법으로 사형을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50만전의 막대한 돈을 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궁형을 받아 내시가 되는 방법이었다.


그는 하급관리로 많은 돈이 있을 리 만무했고, 생식기를 제거 당하는 궁형은 사대부에게 죽음보다 무서운 치욕의 형벌이었다. 그는 선택의 기로에서 최고의 능욕인 궁형을 자청한다.

죽음보다 더 수치스러운 궁형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과업인 ‘사기 史記’를 완성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사마천’이다.

그는 기원전 145년 중국 섬서성 용문에서 태어났다. 황제 측근으로 각종 기록을 담당하던 아버지 사마담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정진했다.


10살 때부터 경전을 암송하고, 17살 즈음 당대 최고의 대유학자 동중서의 문하생이 되어 ‘춘추’등의 역사철학을 배운다.

20대에는 아버지 권유로 역사 유적지를 찾아 중국 천하를 방랑하는데, 이는 훗날 <사기> 저술의 큰 밑거름이 된다.


38살 때인 기원전 108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만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관으로서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사관 집안으로 자부심이 강했던 아버지 사마담이 죽기 전 남긴 유언, ‘역사서의 완성’을 평생 자신의 사명으로 물려받은 것이다.


40대에 접어든 사마천은 조정의 일과 <사기> 저술이라는 두 가지 일을 해내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기구한 운명이 시작되었다. 그의 나이 47살이 되던 해에 일생일대의 큰 사건, 바로 이릉 변호 건으로 황제에게 바른 말을 하다가 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상황은 갈수록 꼬여만 가더니, 결국 이릉이 흉노에게 벼슬까지 받고 병법을 가르쳤다는 근거 없는 소문마저 돌았다. 이성을 잃은 한무제는 이릉의 가족을 몰살시킨 다음, 역적을 옹호한 죄로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마천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대로 억울하게 죽기보다 치욕스럽지만 궁형을 자청한 것이다. 그는 이 시기 꼭 올바른 사람이 승리하는 것도 대접받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그리고 지난날 일어났던 역사적인 일들을 되돌아봄으로써, 붓으로 세상의 부조리와 인간적 가치를 되살려 후세에 전하려 했다.


궁형을 당한 이후 <사기>의 저술 방향은 크게 바뀐다.

漢나라와 황제를 칭송하던 그가 황제에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고, 권력층의 문제를 신랄하게 지적하며 세태를 풍자했다. 또한 사회적 약자, 민중의 삶을 역사의 전면에 끄집어냈다.


2100년 전 당시 민중을 역사의 전면에 끌어냈다는 점은 파격적인 발상으로, 이는 사마천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현실의 부정부패를 과감히 비판하고 정의와 의리를 칭송하는 내용은, 사마천 이후의 역사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는 <사기>를 읽으며 인생의 의미와 처세의 태도, 그리고 인간관계 등에 대해 깊이 사색할 수 있다.

<史記>는 130권, 총 52만 6천 500자로 그 양이 방대하다.

전설 속 중국의 시조인 황제부터 요.순 임금, 하-은-주 왕조, 춘추전국시대, 진시황의 천하통일, 7년에 걸친 楚漢쟁패, 유방이 세운 한나라까지 3000년의 역사를 기록했다.


사마천은 <사기>를 통해 성공과 실패의 법칙, 부와 권력의 비밀, 인간과 사회에 관한 모든 것을 밝혀내려 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말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사기>에는 황제나 고관대작, 영웅과 권세가뿐 아니라 상인과 농사꾼, 심지어 자객과 도굴꾼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종류의 인간 군상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펼치는 생생한 언행은 마치 우리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리고, 언제든지 자신의 처지에 대입하여 삶의 지혜를 얻어낼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특히 사마천 본인이 절실하게 경험했듯,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좌절과 시련을 어떻게 돌파하고 위대한 삶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지 풍부한 사례와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3천년 역사에서 찾은 지혜의 보고 <사기 인문학>을 한 번 읽어보면 어떨까?


한정주 저 <사기 인문학> <북올림>을 참고




가정, 직장, 취미, 어떤 분야든 최고의 파트너를 만나면 삶은 몇 배로 즐거워진다. 하지만 공짜는 없다. 최고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상대의 마음부터 얻어야 한다.


누구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 뛰어나 350년간 세계 최고 부자를 지킨 가문이 있다.

산골마을의 농장주에서 시작해, 세상에 엄청난 역사적 기록을 남긴 이 가문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새로운 시대를 태동시켰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같은 천재 화가를 최고의 예술가로 길러냈고, 갈릴레이 갈릴레오 Galilei Galileo를 후원해 천문학 발전을 가져왔다. 도대체 어떻게?




1) 무엇보다 의리와 신용부터 보여주자


15세기 초반, 실질적으로 메디치 가문을 일으킨 은행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Giovanni di bicci de' Medici'. 그는 당시 후발주자였던 메디치 은행의 로마 점장으로 시작해 은퇴하는 삼촌의 뒤를 이어 직원 17명의 은행을 인계받는다.


이때 본점을 피렌체로 옮기게 되는데, 역사는 거기서 시작된다.

메디치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후 8년간 거래를 지속한 추기경 코사. 이후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며 소규모 은행 메디치는 갑자기 교황의 주거래 은행으로 바뀌게 된다.


조반니 디 비치는 모든 게 잘 돌아가는 듯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이 폐위되어 체포되고 거액의 벌금을 물기에 이른다. 최대 고객이 빚까지 떠안고 몰락하게 된 이 상황에, 조반니 디 비치는 폐위당해 감옥에 갇힌 교황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주며 끝까지 돌봤고, 임종 후에는 화려한 묘지까지 마련해준다.


당시 은행업에서 가장 중요했던 비즈니스 가치는 바로, '의리와 신용'이었다. 이들은 그 사례로 '한번 거래한 고객은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줬던 것이다. 물론 메디치 은행 역시 큰 타격을 받았지만,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마르티누스 5세는 메디치 은행을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으로 지명했고, 그때부터 업계 1위 은행으로 올라선다.


2) 아끼지 말고 전폭적으로 지지하자


평범한 피렌체 소년 미켈란젤로를 위대한 화가로 만든 건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Lorenzo de' Medici였다. 우연히 '산 마르코 수도원' 근처에 있던 메디치 정원을 산책하다가, 조각 연습을 하고 있던 한 소년을 만난다.


그날 소년 미켈란젤로는 사냥과 목축의 신 '파우누스'의 두상을 연습 삼아 조각하고 있었는데, 늙은 파우누스의 얼굴 치고는 가지런히 뻗은 흰색 치아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로렌초는 소년에게 다가가 '늙은 할아버지 이빨 치고는 너무 가지런하지 않니?'라고 말했다.


다음날 같은 장소를 산책하던 로렌초는 어제 만난 소년이 조각해놓은 늙은 파우누스의 완벽한 조각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해, 곧바로 그 소년을 메디치의 양자로 입양한다. 그때부터 미켈란젤로는 웅장한 메디치 저택에서 생활하며,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들에게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배우고 철학자들로부터 플라톤 철학과 미학을 배우게 된다.

이후 르네상스 예술은 미켈란젤로에 의해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발전한다.



3) 틈틈이 끊임없이 새로운 대화를 하자


코시모 데 메디치 Cosimo de' Medici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생각의 틀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공부를 하던 중,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차이에 대하여'라는 강연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그때부터 플라톤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어 플라톤 아카데미를 세우고, 틈나는 대로 그곳을 방문해 사람들과 철학적 토론을 하게 된다.


당시 전 유럽으로 확장되던 메디치 은행을 경영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코시모. 집무실에는 늘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사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음에도, 틈만 나면 아카데미로 찾아가 책 읽고 함께 토론하며 밤을 지새우기 다반사였다.


팍팍한 삶에 '무엇이 나를 가장 큰 행복으로 이끌어줄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토론을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직관과 통찰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단순히 일상적 대화가 아닌,

'공부하고 토론하며 새로운 생각을 교환하는 행위가 영원히 지혜롭게 사는 방식을 가르쳐준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실천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일 때 이 방법은 힘을 가진다.

메디치 가문 역시 그들이 누린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 모두,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지 목적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 세상을 누군가와 함께

즐겁게 살아가겠다는

'인간적 목적'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김상근 저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지식을 말하다>를 참고


그 작품은

내 생명의 피로 쓴 것이라.

- J.R.R. 톨킨 -


1930년대 초, 옥스퍼드대 영문학 교수였던 톨킨은 학생들의 과제를 검사하던 중, 우연히 백지 한 장을 발견했다. 순간적으로 그는 그 종이에 짧은 한 문장을 적는다.

'땅속 어느 굴에 호빗이 살고 있었다. In a hole in the ground there lived a Hobbit.'

모든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현대 판타지의 기본 공식 = 오크, 엘프, 드워프

이 모든 것을 만든 작가 J.R.R. 톨킨


이후 그는 자신이 생각해낸 '호빗'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매우 정교하게...

톨킨이 글 쓰는 것보다도 먼저 만들었던 것은, 호빗이 사는 세상 '샤이어'의 지도였다.

어느 날 문득 적었던 한 문장으로부터 6년이라는 집필 기간 끝에 호빗의 이야기는 세상에 나오게 된다.




이야기의 치밀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속 인물들의 생생한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다 보면, 마치 톨킨이 샤이어에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언어학 재능으로 '엘프어'를 만들고, 인물들은 각자의 생활방식과 성향을 가진 하나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었다.


소설가 톨킨은 어느새 '중간계(땅과 하늘의 가운데 땅)'를 창조하고 있었다.

<호빗>에 대한 반응은 정말 뜨거웠다. 출간 이후 3개월 만에 책은 완판되었다.

곧이어 톨킨은 중간계의 두 번째 이야기를 준비한다.


호빗 이전의 중간계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 호기심으로 만들어진 두 번째 이야기, '실마릴리온'이다.

중간계를 포함한 '아르다' 전체의 역사와 신화를 다루는 방대한 이야기가 탄생한다.

그러나 예상외로 차가운 독자들의 반응으로 <실마릴리온>은 출판조차 되지 못했다.


그 <실마릴리온>이 환영받지 못한 이유는, 호빗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호빗'이라는 매력적인 존재 때문에 이야기를 읽었던 것이다.

다시 호빗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지만, 새로운 이야기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수년간 톨킨의 새로운 책은 나오지 않았다.



포기하려고 했던 톨킨... 그때 톨킨을 끊임없이 격려하고 칭찬해준 친구 C.S. 루이스.

10년이라는 긴 시간 끝에 마침내 출간된 중간계의 3번째 이야기, <반지의 제왕 The Lord of the Rings>.

'20세기 판타지 문학의 정점을 찍다.'


1973년 톨킨이 사망한 이후, 그의 아들 크리스토퍼 톨킨이 원고를 정리하여, 1977년 비로소 <실마릴리온>은 세상에 나오게 된다.

친구 C.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로, 어린이 판타지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톨킨이 '중간계'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던 진짜 이유는, 오랜 전쟁의 역사와 기록의 부족 때문에 제대로 된 '신화'가 없었던 영국을 위해, 톨킨은 영국의 신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


그의 '중간계' 이야기는 근현대 영국을 대표하는 '신화'로 자리 잡았다.

조만간 톨킨과 루이스 두 판타지 작가의 특별한 우정을 정리해서 포스팅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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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4 - [선각자의 유언] - 이유있는 우정의 비밀,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



벤저민 프랭클린이 제작한 '유리 하모니카'는 그때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던 새롭고 신비한 음악을 표현했지만, 지금은 역사 속에서 잊힌 악기로 남아있다.


그런데 이 악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프랭클린의 악기 이름 앞에 이상한 수식어를 붙였는데, '저주받은 유리 하모니카'로 불렸던 것. 왜 저주받은 악기로 알려졌을까?



벤저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

(1706.1.17 ~ 1790.4.17)

미국의 정치가, 외교관, 과학자, 저술가, 신문사 경영자, 교육문화활동가


보스턴 출생. 필명 Richard Saunders. 아버지가 경영하는 양초와 비누 가게 견습공으로 일하다가, 형이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뉴잉글랜드 커런트 New England Courant>紙 발행을 도왔다.  

 

1729년 <펜실베이니아 가제트 Pennsylvania Gazette>지의 경영자가 되었고, 편집까지도 담당하며 유명한 신문으로 발전시켰다.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전신인 필라델피아 아카데미의 창설, 도서관 설립, 미국 철학협회 창립 등 폭넓은 교육문화 활동에도 전념했다.


자연과학에서도 지진의 원인을 연구해서 발표하는가 하면, 열효율이 높은 ‘프랭클린 난로’라든가, 사다리 의자, 다초점 안경, 피뢰침 같은 지금도 유용하게 쓰이는 수많은 물건들을 발명했고, 질병, 곤충, 해류, 인구, 전기, 태양의 흑점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1752년 연(鳶)을 이용한 실험을 통해 번개와 전기의 방전은 동일한 것이라는 가설을 증명했고, 전기유기체설(電氣有機體說 Electric Fluid Theory)을 제창했다. 

 

1753년 영국의 로열 소사이어티(Royal Society) 회원으로 선정되고, 코플리상(賞)을 받았다. 그해 전(全) 식민지 체신장관 대리가 되어 우편제도를 개선했고, 1754년 올버니 회의에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참석, 최초의 식민지연합안을 제안하였다. 1757년 펜실베이니아를 위해 영국에 파견되어, 식민지의 자주과세권을 확보하고 귀국하였다.  

 

1764년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인지조례(印紙條例)의 철폐를 성공시켰다. 1775년 귀국하여 제2회 대륙회의의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뽑혔고, 1776년 독립선언 기초위원에 임명되었다. 그해 프랑스로 건너가 아메리카-프랑스 동맹을 성립시키고, 프랑스의 재정원조를 얻는 데 성공했다. 1783년 파리조약의 미국 대표 중 한 명이었다. 

 

1785년 펜실베이니아 행정위원회 위원장이 되었고, 1787년 헌법회의에는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참석하였는데, 각 주 사이(특히 큰 주와 작은 주 사이)의 이익 대립을 조정, 헌법제정에 진력하였으며 새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 사망했다. 그는 평생 동안 자유를 사랑하고 과학을 존중했으며, 공리주의(功利主義)에 투철한 전형적인 미국인으로 일컬어진다.  

 

저서 중에서 상식철학과 뛰어난 기지와 경구가 넘치는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 Poor Richard's Almanac>은 많은 사람들에게 애독되었다. '한 푼을 저축해야 한 푼이라도 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같은 유명한 경구들도 이 책에서 나온 것이다. 사후에 출판된 <자서전 Autobiography>은 미국 산문문학 중 일품으로 꼽힌다.


악기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유리를 문질러 음을 만드는 것은 과거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이어져 왔으며, 유리에 물을 넣어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다양한 음색으로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다.


이런 종류의 악기는 'idiophone'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더 친숙하게 알려져 있다. 자체 진동을 이용해 소리를 내기 때문에 '크리스털폰'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아주 아름다운 천상의 음을 만들어 낸다고 했다. 이런 음악은 1740년대부터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아일랜드의 Richard Pockrich는 유리잔으로 연주하는 음악가로 유명했다. 1761년 유리잔으로 연주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을 때, 벤저민 프랭클린은 더 정교하면서 쉬운 유리 악기를 개발하려고 열을 올렸다.


그는 Charles James라는 작업자의 도움으로 피아노 건반과 비슷한 모양의 특별한 유리 악기를 개발하게 된다. 37개의 유리그릇을 테이블 위에 배열하여 색으로 구분되는데, 회전하는 방식으로 음을 만들어 냈다. 10개의 유리병이 동시에 연주될 수 있었으며, 기존의 유리 악기보다 쉽고 더 정확했다.


새로 만든 악기의 이름을 Glassychord라고 불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유리 하모니카'로 바뀌게 된다. 이 악기의 최대 장점은 바로 음색이 어떤 다른 악기보다도 달콤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손가락의 강하고 약한 압력에 의해 음색이 부드러워지기도 했고 강하게 변하기도 했다.


이 악기는 1762년부터 세상에 나타나 독특한 디자인과 오묘한 소리로 빠르게 인기를 얻었고, 사람들에게 매우 유명해졌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훔친 아름다운 소리의 이면에는 무서운 이야기도 있다.


음악을 듣다가 어지럼증과 메스꺼움을 느끼거나 졸도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심각한 경우에는 우울증에 걸리거나 귀신을 보는 괴현상까지 경험하게 된다고 했다. 장시간 음악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악기는 자살 충동을 일으키거나 정신병에 걸리게 만드는 '저주받은 악기'로 불리게 된다.

독일의 음악학자 Friedrich Rochlitz는 악기를 장시간 연주하지 않도록 경고했다고 한다.

'유리 하모니카'의 아름다운 음색 속에는 어떤 비밀이 있었던 것일까?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리 하모니카에 저주가 내렸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어떤 이들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의도적으로 제작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의도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구체적인 이론도 존재한다고 한다.


문제는 바로, 악기의 소리가 인간의 청력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유리 하모니카의 특정 주파수는 1KHz에서 4KHz 범위에서 나타나며, 이 주파수가 인간의 귀와 두뇌에 영향을 주어 이상 현상을 만들어낸다는 이론이었다.


일각에서는 악기에 사용된 유리에 납이 함유되어 있어 사람들에게 납 중독을 일으킨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납 중독은 18세기와 19세기에는 일반적이었고, 두통과 과민반응 그리고 발작 같은 증상과 함께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던 증상이었다.


악기를 가까이 두고 있던 사람들에게 나타난 이상 현상들이 납 중독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소문에 대한 진실이 무엇이든, 저주받은 악기에 대한 이야기로 인해 1800년대 초 유리 하모니카의 인기는 급격히 사라지고 말았다 한다.


그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이유 중에는 저주 이야기뿐만 아니라, 제작에 사용된 유리가 약하거나, 당시 유행했던 콘서트홀 전체에 울려 퍼지기에는 충분치 않던 소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점차 사라져 버렸다는 주장도 있다.


현재 이 악기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소장하고 있거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762년 세상에 처음으로 나타나 수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던 Glassychord, 과연 이 악기에 감춰진 어두운 수수께끼는 무엇일까?


출처 : <Amazing Story> <Peter Wagner>


인류의 역사는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써져야 할 것 같다. 사실에만 근거해서...


'보스니아 피라미드'는 수도인 사라예보 서북쪽으로 20Km 떨어진 마을 비소코 Visoko에서 발견된 것으로, 유럽에서 발견되고 발굴된 최초이며, 세계 최대의 피라미드이다.


이것은 2005년 보스니아 대학의 인류학과 교수인 '세미르 오스마나기치 Semir Osmanagich' 박사가 최초로 발견했다. 박사는 20년 넘게 멕시코,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등의 피라미드 발굴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학자이다.


처음엔 전체가 수목이 우거진 평범한 산처럼 보였지만, 4면이 정확히 동서남북 기본 방위를 향하고 있고 45도 각도로 만들어져 있었다. 산의 토양 퇴적물을 일부 제거해 보니, 인공 구조물인 콘크리트 블록들이 드러났는데, 이것이 현대의 것보다 더 정교하고 단단한 성질을 갖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자연적으로 형성된 평범한 산이 아니라, 분명한 인공 피라미드로 밝혀진 것이다.

현재까지 지구상에서 발견된 피라미드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인데, 눈에 보이는 높이만 220m 이상으로, 147m인 이집트 기자 피라미드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이다.


피라미드를 덮고 있는 토양을 Agro-pedology 국립연구소에서 분석한 결과, 최소 12,0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이것의 건설 시기는 최소 12,000년~34,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한 개의 콘크리트 슬라브 아래에서 발견된 나뭇잎 화석의 방사성 탄소 연대는 약 33,800년이며, 덮여있던 흙 퇴적물 사이에서 발견된 유기물의 매장 연대는 약 24,800년 전이었다.


피라미드의 부근에서 또 다른 4개의 피라미드 형태도 추가로 발견되었는데, 각각 태양, 달, 용, 지구, 사랑의 피라미드로 명명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하에서 각 피라미드를 연결해주는 미로 같은 터널과 원형 석판, 세라믹 조각들도 발견되었다.



이 5개의 피라미드들은 모두 진북 방향을 향하고 있고, 태양, 달, 용의 피라미드는 각각 정확하게 2.18Km씩 떨어져 있으면서 완벽한 정삼각형의 세 꼭짓점을 이루고 있다. 자연적인 산은 이런 기하학적 패턴을 절대 형성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그중 가장 큰 '태양의 피라미드'를 그래픽으로 복원해보면 마야 문명의 피라미드와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한다. 그곳의 서쪽으로 이어진 '접근 고원'이라 불리는 곳에서, 인공적으로 돌을 잘라서 현재의 위치로 운반된 사암 타일로 포장되어있다.


주변에는 사암 타일의 유적지와 도시 공간의 일부도 추가로 발견되었다.

피라미드 남쪽 측면에는 홍수 퇴적물로 뒤덮여있는데, 학자들은 이런 퇴적층의 존재가 바로, 이 구조물들이 고대 빙하시대의 건축물이라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러시아, 크로아티아, 영국의 과학자들이 이 피라미드의 정상 지점에서 28KHz의 파동 주파수를 가진 전자기장 에너지 빔이 지속적으로 수직으로 발산되고 있는 것을 밝혀냈다. 이 주파수는 인간이 흔히 사용하는 주파수는 아니며, 자연에서도 자주 접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이 에너지 빔은 위로 상승하고 멀어지면서 강도가 커지는데, 이 현상은 기존의 물리법칙과 모순된다고 한다. 태양의 피라미드는 지구가 발산하고 있는 천연 자기장 에너지를 더욱 강하게 증폭시켜, 우주로 쏘아 올리는 것으로 보인다고 과학자들은 추정했다.


빔은 약 4~8.5m 반경으로 발산되고 있는데, 피라미드 내부에 일종의 에너지 방출 물질이 있거나, 고대에 제작된 어떤 특별한 장치가 현재까지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꼭대기에서 에너지가 방출된다는 것은 퇴적물 아래에 자연적이지 않은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빔 방출은 레이저에서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렇게 낮은 주파수에서 빔을 발산하는 레이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가능성은 현대의 군사용 기술인 마이크로파 빔 무기나 항공우주 추진 기술과 유사한 빔일 수 있다는 것만 유추할 뿐이다.


그렇지만 피라미드가 건설된 시기는 석기 시대이다. 현대 과학보다 더 진보된 기술이 피라미드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크로아티아의 전기 기술자이자 물리학자인 Mizdrak 박사 팀의 연구 결과는, 에너지 빔이 피라미드의 약 2Km 아래쯤에서 시작되고, 최소 10KW의 전력을 필요로 할 것으로 추정했다. 그렇다면 34,000년 동안 계속 기능을 발휘해온 첨단 무연료 발전기가 존재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피라미드의 지하 한 터널에서는 3개의 방과 인간에게 유익한 것들도 확인되었다. 그곳에는 슈만 공명이 일어나고 일반적인 경우보다 43배에 달하는 음이온이 검출되었는데, 인간의 신체 치유에 매우 유리한 조건이라고 한다.


최초에 발견한 세미르 오스마나기치 박사는 이 피라미드가 왕을 위한 무덤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거대한 에너지 발전소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외에도 보스니아 Zavidovici 마을 인근 숲에서는 정체불명의 거대한 구체도 발견되었다. 지름은 3m, 무게 35톤 이상이며, 철 함량이 아주 높아 단순한 바위 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오스마나기치 박사는 이것도 역시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닌, 고대 선진문명의 흔적이라고 주장했다.


주류 학계와 보스니아 정부는 이 지역을 조사하고 있는 고고학자들에 대한 지원을 꺼리고 있거나 방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류 학계는 현존하는 역사적 지식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는 현재의 이론과 양립하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전 세계의 주류 학계는 1만 년 이상 그 이전, 지구상에 분명히 있었던 초고대 문명의 실재와 그 존재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2005년 발견 당시 전 세계적인 이목이 집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보스니아 피라미드'는 가설로 취급받고 있다.)


Semir Osmanagich 박사의 최종 결론


"고대 역사, 특히 인류의 기원이나 문명과 피라미드에 대한 거의 모든 가르침은 잘못되었다. 호모 사피엔스 (현생인류)는 진화의 산물이 아니며, 생물학자들은 절대로 잃어버린 고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지적인 인류는 유전공학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수메르인들은 문명인의 시작이 아니라, 가장 최근의 인류 사이클의 시작이다. 그리고 피라미드는 에너지, 천문학, 기하학, 건축학에 대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발전된 존재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출처 : <Pre-Historic and Ancient Human Societies> bosnianpyramid.com, <JJ Kosmos> <The Bosnian Pyramids - Could they really be 34,000 years old? If so what does it mean for our history?> steemit.com <World Ranking>


뭔가 독창적이고 신선한 아이디어 없을까?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신박한...
우리는 종종 지금껏 세상에 없었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짱구를 굴려보지만,
"그거 이미 나와 있잖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한숨만 내뱉게 된다. 최초가 되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뭔가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당신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반드시 최초가 아니어도 된다.'
'최초가 되는 것만이 중요한 건 아니다.'

과거를 살펴보면 후발 주자가 최초를 뛰어넘는 경우는 무수히 많다. 역사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템을 먼저 선점해 최초로 선보이는 것보다, 비슷한 아이템이라도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지금부터 최초가 아니었음에도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세 가지 사례를 알아보자.

미국판 싸이월드 'MySpace'
한때 2억명 이상의 유저와 월간 방문자 7,600만명을 자랑했던 미국판 싸이월드, 'MySpace'
마이스페이스는 2005년 미디어 재벌그룹 '뉴스 코퍼레이션'과 손을 잡게 되면서 엄청난 기회를 얻게 되었으나, 자유분방함과 관료주의 문화가 충돌하게 되면서 둘은 갈라서게 된다.

그에 대한 충격이 커서였을까? MySpace는 타 플랫폼과의 서비스 제휴를 거부했다. 게다가 부실한 실적을 살리기 위해, 웹사이트를 배너 광고로 도배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페이지를 불러오는 속도는 느려졌고, 유저들은 하나둘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결국 MySpace는 2008년 소비자 중심적 사고와 개방적 플랫폼이라는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페이스북에게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필름 사업의 'Kodak'
100년 넘게 장수하며 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만들었던 Kodak.
당시의 디지털카메라는 부피가 너무 컸고, 흑백 사진 한 장을 저장하는데 23초나 걸려 대중화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렇지만 코닥은 그 점을 개선하려 하지 않았다.

코닥은 돈벌이가 짭짤했던 필름사업에 대한 미련을 끝내 버리지 못했고, 그 대가로 2011년 디지털카메라야말로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제품이라 여겼던, 캐논과 니콘에게 자리를 내주며 파산을 맞게 되었다.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진나라'
백성들을 억눌러 국가를 통치하려 했던 진나라는, 부국강병에 초점을 맞춘 법가사상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최초의 통일 제국 진나라는, 한나라에게 패권을 내어주게 되면서 15년 만에 막을 내리고 만다.

한나라는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여, 정치, 사회의 위계질서를 제대로 확립하면서 향후 중국 왕조들의 모범이 된다. 당시 정치가들 입장에서 볼 때, 대를 물려주어도 떳떳한 시대정신은 유교였다.

중국 사람을 지금도 '한족'이라 부르고 중국 글자를 '한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진나라처럼 최초의 통일 왕조는 아니지만 중국의 기반을 마련해준 한나라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최초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업을 운영하는 방식과 당대의 시대정신을 파악해 수용하는 능력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무엇이 사라졌고 무엇이 살아남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면, 먼저 역사 속에서 사례를 찾아보라. 역사는 최초라는 수식어 외에 다양한 기회를 보여줄 것이다.

누군가 최초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소식에 더 이상 절망할 필요도 슬퍼할 이유도 없다. 기회는 최초에게만 오는 것은 아니다. 후발 주자에게도 오는 것이 바로 기회이다.

여러 매체에서 최초라고 주장하는 제품과 서비스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라. 만일 그 최초가 시대정신을 담지 못하고 있다면, 이 말을 떠올려 보자.


중국인은 위기를 두 글자로 씁니다.

첫 자는 위험의 의미이고,

둘째는 기회의 의미입니다.

위기 속에서는 위험을 경계하되,

기회가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 존 F. 케네디 -


제4의 물결, 답은 역사에 있다
국내도서
저자 : 고평석
출판 : 한빛비즈 2017.04.15
상세보기

고평석 저 <제4의 물결, 답은 역사에 있다>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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