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문사가 취재기자 지원서 접수를 마감했다. 지원자도 많았고 문의메일도 아주 많았다고 한다.

취재기자가 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굳이 답을 하자면 너무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반복해서 쓰는 것만큼 좋은 글쓰기 훈련은 없다.

 


여러 글쓰기 대가가 들려준 ‘습작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하자면,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스티븐 킹은 단호하게 말한다.
“많이 읽고 많이 써야 한다.”
이 두 가지를 슬쩍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그러면서 그 자신의 경우 1년에 70~80권의 책을 읽고, 하루에 10페이지씩 쓴다고 했다. 그 정도면 3개월에 책 한 권이 나오는 수준이라고 한다.
물론 그는 비평이 아닌 소설 창작에 대해 얘기한 것이지만, 어떤 종류의 글에 적용하더라도 방법론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글쓰기에 대해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유시민 작가는 독특한 표현을 썼다.
‘글쓰기 근육’
근육을 만들고 싶다면 일단 많이 써야 한다. 그게 기본이다. 언제 어디서든 글을 쓸 수 있다면 무조건 쓰는 게 답이다. 그것이야말로 진부한 처방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처럼 습작은 글쓰기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반복적인 행동이다.
<힘 있는 글쓰기>를 펴낸 피터 엘보는 글쓰기에 있어 ‘탁월함은 어떻게 끌어내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단호하게 말했다.
‘엄청나게 많이 쓰지 않고서 탁월한 글을 써낼 가망은 거의 없다.’

또 <하버드 글쓰기 강의>를 쓴 바버라 베이그는 아예 책의 첫 번째 장 제목을 ‘습작’에 할애하면서, 습작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 이렇게 반문했다.
“운동선수와 음악가가 필요한 기술을 익히고 훈련을 통해 그 기술을 끊임없이 연마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당신은 왜 글쓰기 연습을 하지 않는가?”

습작을 하지 않는 것은 아무런 훈련이나 준비도 없이 실전 야구 경기에 나가는 선수, 콘서트에 임하는 음악가와 똑같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프리 라이팅 Free Writing 훈련’을 소개했다.
‘한 번에 10분씩, 일주일에 3회씩 몇 주간 반복하라.’
글쓰기 근육도 그 흔한 ‘주 3회 운동’을 하여 단련시키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글쓰기 생각쓰기>의 윌리엄 진서는, 쓰는 사람의 태도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글쓰기가 직업인 사람들은 매일 쓰는 양을 정해놓고 엄격히 지켜야 한다. 글쓰기는 기능이지 예술이 아니다. 영감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기능을 연마하는 일에서 손을 떼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가 제시하는 글쓰기를 배우는 유일한 방법이란 바로, ‘강제로 일정한 양을 정기적으로 쓰는 것’이다.
하지만 습작을 반복한다고 해서 원하는 만큼 좋은 글을 쓰게 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기자 등 직업적 글쓰기를 꿈꾸는 사람들은 ‘분량과 마감’에 대한 끊임없는 인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한편의 영화에 대해 글을 쓰되, 어딘가로부터 청탁을 받아 정해진 기간 안에 제출하는 느낌을 상기하면서, 200자 원고지 10매 분량 그러니까 A4지 1장 정도의 글을 5시간 안에 쓰기로 마음먹고 실행에 옮겨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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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만족스러울 때까지 써나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정해둔 분량과 시간 안에 ‘한편의 글’을 완성해보는 것이다.
시간에 쫓겨 억지로 마감했다면, 무엇이 부족한지 눈에 보일 것이다. 그걸 고치면 된다.
물론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서 문제지만, 언젠가는 만족스러운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스티븐 킹 저 <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를 참고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유학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책이 있다.

유학의 거장인 퇴계 이황은 서른 무렵 이 책을 접한 후, 마지막 순간까지 매일 새벽마다 읽었다 한다.


실학의 거장 다산 정약용 역시 18년간의 유배생활 중 방대한 학문체계를 정리하면서,

‘그 동안의 공부를 이 책으로 매듭짓고자 한다’라고 썼다. 그 정도로 이 책은 조선의 선비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책이었다.


책이 도대체 그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길래, 조선의 대학자들이 그토록 빠져들었던 것일까?

그 책의 이름은 바로 ‘심경(心經)'이다.

심경은 주자의 제자였던 송나라 학자 진덕수(眞德秀)가 편찬한 책으로, ‘마음’에 대해 다룬 유교 경전이다.




사서삼경과 함께 주희, 주돈이, 정이천 같은 유학자의 글 중에서, 마음공부에 관한 내용을 가려 뽑아 만들었다.

사서 :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삼경 : 시경, 서경, 주역(역경)


책이 처음 나올 당시 중국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퇴계 이황이 이 책의 가치를 알아보고 적극 연구하면서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후 ‘심경’과 그 주석서인 ‘심경부주’는, ‘인간의 마음이해’를 위한 성리학자들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논어, 맹자, 중용처럼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다른 동양고전들에 비해, ‘심경’은 우리가 왜 잘 알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철저히 잊힌 책이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급격한 재건의 과정을 지나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숨가쁜 역사를 만들고 겪어왔다. 그런 현실 속에서 어쩌면 ‘마음’을 돌보는 일은 배부른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마음을 지켜내는 것에 대한 깊은 사유보다는,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치열한 쟁취의 과정을 겪은 지금 우리는 원하는 대부분을 얻게 되었지만, 급하게 쌓아 올린 만큼 우리 안의 문화는 다양한 결이 뒤섞여 분열적인 모습을 나타내기 일쑤다.

마음공부에 소홀해진 오늘날 현대인들은, 마음을 어딘가에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은 저 알아서 가는 것이고, 문제는 대체로 ‘밖’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공부를 이야기하면 언어유희 내지는 사치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결과 모두가 자신을 지킨다는 명분을 앞세워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 버렸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분노하고 거침없이 냉소를 날린다. 실익은 챙길지 모르지만, 언제부터인지 우리의 내면은 거칠고 메마르게 되었다.


맹자 고자장구(告子章句) 상(上) 편에는 이런 글이 실려있다.

‘사람들은 닭이나 개를 잃어버리면 곧 찾을 줄 알지만, 잃어버린 마음을 찾을 줄 모른다. 학문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데 있다.’


정작 가장 소중한 자신의 마음을 잃고서는 찾을 줄을 모른다. 심지어 그것을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마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곧 자아를 상실한 것과 같다. 마음은 곧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맹자는 잃어버린 인의(仁義)의 마음을 찾아 양심을 회복해야 한다며, 이것이 진정 학문의 길이라고 말했다.

다산 정약용 역시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삶의 주제도 바로 마음이었다. 다산은 정조 임금과 함께 조선 후기 개혁을 이끌었지만, 18년 간의 유배생활을 겪어야 했다.


유배 초기에는 받아주는 데가 없어, 가난한 떡장수의 좁은 집에서 뒷방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고난의 시기에 다산은 심경에 심취했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자신을 위한 마지막 공부를 마음을 다스리는 ‘심경’으로 맺고자 한다며 ‘능히 실천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결국 다산은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고난을 이겨내는 힘이며, 학문의 끝이라고 말한다.


공자는 마음이란 스스로 붙잡지 않으면 곧 어디로인지 모르게 가버린다고 했다. 마음은 이목구비의 욕망과 희로애락의 감정으로 인해 끊임없이 유혹을 받는다. 만약 단 한 순간이라도 마음을 놓아버리게 되면 천리 바깥으로 달아나 회복이 어려워진다.


현대문명이 안고 있는 문제의 대부분은 물질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것들을 다루는 인간의 마음이 어떤가에 달린 문제라고 한다.

욕심에 사로잡혀 인간의 양심을 잃어가는 지금,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번 살펴볼 때다.


조윤제 저 <다산의 마지막 공부 : 마음을 지켜낸다는 것> <BetterLife>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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