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격차>의 권오현 회장은 이런 말을 한다.
“성장하지 못하는 생존은 사실 천천히 전개되는 퇴화와 멸종의 과정일 뿐이다.”
성공했던 기업이 계속 성공하지 않는다면, ‘결국 망하게 된다’는 말이다.

만약 우리가 성장을 추구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또는 한번만 제대로 성공을 거두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보장된다면, 이런 <초격차> 책 붙들고 아까운 시간 쓸데없이 낭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단 1년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4차산업혁명이라는 변화와 혁신의 초경쟁 사회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개선이 아닌 혁신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 지속적인 성장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자만이 생존할 수 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가 집필한 책 <호모 사피엔스>에서도 같은 명확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는 절대 성장을 멈출 수 없다’라는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이미 세계는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시스템 네트워크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그 누구도 성장에 대해 브레이크를 걸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자본주의는 성장을 멈추는 순간 모두가 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그 순간, 우리 인류는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고 발전해야 하며, 미래의 먹거리를 찾아 눈을 부릅뜨고 사투를 벌여야만 한다.

1등이 성장을 멈추면 호시탐탐 노리며 커가는 경쟁자에게 자리를 내줘야 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맹점이다.
어쩌면 우리 인류의 최종 목적지는 성장을 거듭하다가 모든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가상의 세계에서 또 다른 삶을 추구해야 하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리는 마차에서 일단 생존하려면 우리는 1등을 차지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1등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초격차! 즉,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한계를 뛰어넘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격을 만드는 것이 바로 ‘초격차 전략’이다.

노동집약적 사업에 익숙한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노동의 강도를 높이면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계산기가 등장하면 주판은 사라지고,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하면 필름 회사가 도태될 수밖에 없듯이, 새로운 혁신은 늘 과거의 패러다임을 철저하게 부숴버린다.

 


나쁜 리더는 오늘 주어진 달콤한 열매를 즐기지만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 자들이고, 나쁜 조직은 타성에 젖어 혁신에 저항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의 집합체다.

누구나 우연히 성공을 맛볼 수는 있다.
그러나 달콤한 열매만을 맛보고 있다면, 금방 다른 누군가에게 추월 당할 것이다. 시험에 합격해 이제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안주할 때, 당신의 주판은 계산기 때문에 쓸모 없어질 것이다.

누구나 안정감을 원한다.
그러나 완벽한 안정감이란 초경쟁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발전해야 하고 성장을 거듭해야 한다.
설령 그것이 매우 비극적인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하고 또 성장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오늘만 한정특가!


당신은 지금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
성장론에 거세게 저항하며 세상을 비난하고 퇴화의 길을 스스로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초격차 전략을 통해 안주하려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선택을 하겠는가?

권오현 저 <초격차 : 넘볼 수 없는 차이를 만드는 격>를 참고

아담 스미스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경제의 원리가 그 나라의 부를 증대시킨다고 했던,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학자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상징으로 대접받는다.

 

아담 스미스는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잘 모른다. 조금 비틀어지고 그럴듯한 아래의 내용만 반복해서 들었을 뿐이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 술집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 덕분이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심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닌 그들의 이익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그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바탕으로 한 시장경제체제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모두에게 만족을 주고, 모든 이들의 부를 증대시킨다고 주장한다. 이기심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면서, 모두를 이롭게 하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급진적인 자본주의자들 혹은 각종 규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일부 세력들은 자신들의 이기심과 탐욕을 긍정하고 변호한다.

자신들의 탐욕이 모두를 이롭게 하고 있다면서, 내가 돈 버는데 방해 좀 하지 말라고 그 욕심을 정당화한다. 또 사회가 자신들의 탐욕을 방해한다면서, 아담 스미스를 인용해 자유경제를 주장한다.

 

그러나 시장의 원리를 말하기 전에 매우 중요한 전제가 하나 빠져있다.

우리는 국부론의 이기심보이지 않는 손만 보았지, 그가 말한 도덕철학과 정의는 배운 적이 없다그의 첫 번째 저서 <도덕감정론>에서 이야기하는 사회질서는 어떤 원리로 작동되는지 알아보자.

 

우리 사회는 나름대로 질서 있게 돌아간다.

아담 스미스는 무엇이 사회질서를 만드는지 고민했고, 그 원리는 인간의 감정에 근거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이기적이라 하더라도 그 천성이 타인에게 관심을 가진다. , 나는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반대로 타인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역지사지 해본 다음 타인의 감정과 행동의 타당성을 판단한다. 이를 공감 sympathy’이라 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타인도 나를 역지사지하고 나의 감정과 행동을 판단한다.

 

타인의 인정은 나를 기쁘게 하고, 부정은 나를 불쾌하게 한다. 당연히 나는 부정보다는 인정을 받기 원하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잇는 행위를 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타인이 아니기 때문에 타인의 마음을 알 수는 없다. 그래서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를 통해서 타인의 입장이 되어본다.




, 우리는 경험을 바탕으로 공평한 관찰자를 마음속에 만들고, 그 공평한 관찰자가 나의 행동이 옳았는지 잘못되었는지 판단함으로써, 우리의 행위를 스스로 평가하고 타인의 행동도 판단한다.

그러나 세상은 불확실함으로 가득 차있다. 좋은 마음으로 했던 행동의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고, 나쁜 마음으로 한 행동의 결과가 좋을 때도 있다.

 

한편 실제 세계에서는 결과만을 보고 칭찬하거나 비난이 주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를 통해 우리 스스로를 위로한다.

열심히 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 우리는 졌지만 잘 싸웠다고 위로하고, 부득이하게 불운이 닥쳤을 때는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위로한다.

 

우리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면서 묵묵하게 자기 길을 걷는 사람을 지혜롭다고 칭찬하지만, 타인의 평가에만 목을 메고 과정보다 결과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을 살고 있다.

이들은 자기 마음속의 공평한 관찰자를 무시하고, 결과에 기반한 타인들의 평가에만 집중한다.

 

아담 스미스의 도덕사상은 간단하다.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공감에 충실 하라는 것이다. 그는 제한 없는 이기심을 허용하지 않았다. 제한 없는 이기심은 공평한 관찰자의 공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노동운동을 보더라도 공평한 관찰자의 공감이 다르게 작용함을 느낀다.

1970년대 기계만도 못한 취급을 받던 재봉틀 공장 노동자들의 분노에는 공감하지만, 21세기 연봉 1억원의 귀족 노조들의 투쟁에는 공감하지 않는다.


인간은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판단을 일반적 규칙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고려하는 감각 곧 의무감 sense of duty’ 혹은 도덕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가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행위에 대해서는 법으로 처벌하도록 하고, 이를 정의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은 아담 스미스에 대해 이기심을 조장하는 최초의 경제학자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는 내면의 공평한 관찰자의 공감이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했고, 정의를 해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국가가 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개인의 무한한 이기심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 적은 없다.

 

먼저 정의와 도덕감이 전제된 이후에 시장경제를 논하는 것이 아담 스미스 사상의 핵심일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가 내 속에서 잘 작동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쫓지는 않는지, 나의 모든 행동이 양심껏 거리낌이 없는지 등,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가 정말 공평해지도록 타인의 입장을 이해해보는 습관, 그리고 삶을 다양한 경험으로 채우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BetterLife>를 참고



그는 과거에 런던 금융맨으로 애널리스트였다.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에서 남부럽지 않은 월급을 받으며 살던 그는, 어느 날 한 파산한 회사의 구조조정 업무를 맡게 되었다. 약 400명의 직원들에게 해고를 통지해야 하는 상황, 그 일은 단순한 숫자가 아닌 사람을 상대하는 실제 상황이었다.


그 일을 끝내고 자본주의의 냉정한 현실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에게 회의를 느끼고 퇴사를 결심했다. 아파트를 판 돈 5천만원을 가지고 그는 세계 여행을 떠났다.


컴퓨터의 숫자놀음을 넘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발로 뛰며 세계 경제를 배웠고, 세계일주를 하면서 5천만원으로 시작한 장사는 1억원이라는 결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 세계일주를 통해 실제 경제를 배웠던 그는, 책을 내고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강연자로 변신할 수 있었다.


<나는 세계일주로 경제를 배웠다> 그리고 <나는 세계일주로 자본주의를 만났다> 두 책의 저자인 ‘코너 우드먼’, 경제에 대해 꽤 많은 걸 알았다고 자부했지만, 아직도 제대로 모르는 분야가 남아 있었다.

바로 ‘지하경제’였다.

그의 세번째 저서 <나는 세계일주로 돈을 보았다>는 지하경제 세계와 그의 경제적 관점을 쓴 책이다.




수많은 경제주체들은 사회와 일상에서 열심히 일하며,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마약상, 마피아, 야쿠자 등 흔히 말하는 지하경제의 주인공들에게 궁금증이 들기 시작했다. 과연 이들의 현실 속에서는 어떨까? 정말로 돈을 벌고 있을까?


그들 손으로 움직이는 지하경제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고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대체 그들의 경제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고 싶었다. 4년 이상 그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NGC와 ITV, BBC 방송과 함께 세계 유명 도시를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도시 풍경에 숨어있는 지하경제의 주체들을 찾아 다녔다.


그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면서 알게 된 그들의 범죄는 생각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끔찍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가 그저 돈을 벌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범죄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일말의 가책이나 아무런 감정 없이, 그저 묵묵하고 성실하게 돈을 벌기 위해서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오늘날 지하경제의 크기는 우리 모두의 상식으로 상상하는 규모를 벗어나고 있다.

세계 노동인구의 절반인 18억이 암시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전 세계 ‘범죄 기업’들의 수익은, 세계 500대 기업 중 50개 기업의 수익 총계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이 거대 범죄 기업들은 세계 어디에나 퍼져있고, 이 범죄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당신을 필요로 한다. 미국, 아르헨티나, 인도, 스페인, 영국, 이스라엘, 콜롬비아의 8개 도시를 돌아다니며 그가 겪었던 범죄들, 그리고 지하경제의 실체를 여러분도 어느 정도 꼭 알았으면 좋겠다.


그 수많은 SNS를 통한 친구 요청? 끊임없는 이메일 속의 뭉칫돈이나 비자금 브로커? 메시지에 강한 듣보잡 정부관리들? 검디검은 다크웹의 상대들?

여러분이 알지 못한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범죄들이 수없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모르고 있다면 당신도 그들에게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코너 우드먼의 8개 도시에서 찾아낸 지하경제 이야기 <나는 세계일주로 돈을 보았다>를 참고




'자본'의 극대화에서 그 근원인 '가치'의 극대화로 초점이 옮아가면 세상은 어떻게 변해갈까?


돈은 가치를 자본주의 경제에서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한 것에 지나지 않고, 가치를 교환하는 한 가지 선택지에 불과하다. '가치'를 높여두면 언제든 돈으로 바꿀 수 있고, 돈 이외의 물건과 교환할 수도 있게 된다.


인기 있는 유튜버들은 돈을 잃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팬을 잃는 것은 두렵다고 말한다. 자신의 가치는 동영상을 보는 팬들의 흥미와 관심에서 나오고, 그들에게는 그들의 흥미, 관심이라는 내면적인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돈은 가치의 일부를 변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처럼 풍요로운 사회에서 젊은이들은 흥분이나 공감 같은 정신적인 요소나 사회 공헌 활동 등을 점점 더 중시하고 있다. 좋은 대학을 나와 일류 기업에 취직할 수도 있는 엘리트가 NGO나 NPO 등의 사회적 활동에 전념하면 (자본주의에선 비합리적인 선택이라 하지만) 가치주의에서는 합리적인 진로 선택이다.



이런 관점을 사회 전체에 확대 적용해보면 큰 변화를 예측할 수 있다.

시장경제와 민주정치가 사회의 두 바퀴 역할을 수행하며 균형 잡힌 상태가 현대사회이다. 하지만 가치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면 경제와 정치는 접근 방식만 다른 동일한 활동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일례로 빈곤 추방은 원래 정치의 과제였지만, 무하마드 유누스의 그라민은행처럼 경제에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 역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는 나라에 무료로 와이파이 시스템을 제공하려 하고 있다. 물론 사업의 일환이고 기회를 창출하는 노력이지만, IT 인프라가 부실한 지역의 수십억 인구에게는 큰 혜택이다.


가치주의 관점에서는 제공하는 가치와 경제적 성공이 밀접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에게 가치를 제공하려는 경우 사업은 결국 '공익성'을 띠게 된다. 한편으로 민간 조직이 빈곤 추방 같은 과제를 설정하고 이를 실현하려면, 기부금이나 세금에 의존하지 않는 사업의 '지속 가능성'이 요구될 것이다.


경제 활동에는 '수익성'이 요구되고, 정치 활동에는 '지속 가능성'이 요구된다. 이렇게 되면 경제와 정치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질 것이다. 즉, 가치주의란 양자의 경계에 존재하는 개념이 된다.


이제 선진국에서는 상품이 흘러넘치기 때문에 제조업은 한물가고 있다. 대신 물건을 취급하지 않는 서비스업이 중심이 되고, 온라인에서 완결되는 사업이 주목받고 있다. 이같이 산업의 축이 이동하는 가운데, 물건이나 토지, 건물 등을 전제로 만들어진 현대의 재무제표로는 기업이나 사업의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없다.


물론 무형 자산으로 재무제표에 반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일부만 가능하다. 예컨대 웹 서비스를 하고 있는 회사의 최대 자산은 자사 서비스의 이용자이다. 여기서 얻은 구매 행동 데이터도 중요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현재의 재무제표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IT 관련 기업은 재무제표에 기업의 경쟁 우위 가치가 전혀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해당 기업의 장래성을 예측하기 어렵다. 상품을 제조 판매하지 않는 기업, 특히 인터넷 기업은 '사람'이 중요하다. 기업의 성장은 우수한 인재가 보람을 갖고 일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어쩌면 앞으로는 종업원 만족도 같은 데이터도 '자산'으로 인식되어 기업 가치에 추가될지도 모른다.


인터넷 기업에서 재무제표에 기입되지 않는 대표적인 항목 둘을 꼽자면 '인재'와 '데이터'이다. 현재의 금융은 서버에 있는 데이터도 무가치한 요소로 치부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황금 같은 것이어서, 회원, 구매, 광고 데이터 등을 잃어버린다면 폐업을 할 수밖에 없다.


의자나 컴퓨터 같은 비품을 잃어도 인터넷 기업은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데이터를 잃어버리면 끝장이다. 데이터야말로 가치이고 돈을 벌어들이는 '자산'인 것이다. 현재의 금융이나 회계에서는 이를 감안하지 않기 때문에 곤란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페이스북의 재무제표로 그 기업의 가치를 판단하는 금융인들은 거품이 잔뜩 끼었다고들 했다. 그러나 페이스북의 최대 가치는 이용자 데이터였고, 그것의 가치를 돈으로 바꾸지 않았을 뿐이다.


만약 이러한 이용자의 행동 데이터도 자산으로 취급해서 기업 가치에 반영할 수 있다면, 전문가들이 섣부른 평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데이터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기존 금융의 틀은 점점 현실 세계의 가치를 바르게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페이스북과 구글이 대표적으로 재무제표와 현실 세계의 영향력에 커다란 괴리가 있는 IT 기업임을 보여주는데, 앞으로 모든 기기와 장치, 산업이 인터넷(IoT)에 연결되면, 'IT 기업'이라는 분류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데이터를 '가치'로 인식하게 되었고, 돈으로는 계상할 수 없는 '가치'를 중심으로 회사가 성장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기존 금융의 틀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가치주의 Valueism :

가시화된 '자본'이 아닌, 돈과 같은 자본으로 변환되기 전의 '가치'를 중심으로 사회가 움직이는 개념.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는 실용성(사용가치, 이용가치)이나, 윤리적이고 정신적인 관점에서 진, 선, 미, 애 등 사회의 존속에 도움이 되는 '가치'를 중심으로, '희소성'이나 '독자성' 등과 함께 경제적 실용성, 정신적 효용, 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행위 등을 포괄한다.


2008년 9월의 리먼 사태로 금융세계가 실물경제와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느낀 사람이 많아졌다. 수학자들이 동원되어, 만든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을 정도의 복잡한 금융 상품을 만들었다. 개별 지표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다루기 힘든 금융 상품으로, 리스크를 획기적으로 줄였다면서 대량 판매를 한 것이 결과적으로 금융위기를 초래했다.


자본주의와 금융업계에서 일어난 비극은 교환수단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극단적인 방향으로 밀고 나간 데서 비롯되었다. 돈은 가치의 교환, 보존, 기준 척도 등으로 기능하며, 은행이나 증권도 산업 활동과 가계 살림을 지원해주는 역할을 해왔고 (금융경제, 자산경제), 원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돈벌이라는 수단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그것만 쳐다보면서, 결과적으로 실물경제(소비경제)나 사람들의 생활과 전혀 관계없는 데서 돈만 움직였다.



유통되는 돈의 90%는 자산경제 부문에서 생겨난다. 실물경제에서 쓰는 돈은 전체 화폐 유통량의 10%도 안 된다. 큰돈을 굴리고, 주식을 사고팔고, 이자 수입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소수의 사람들이 운용하는 자산경제가 돈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 경제는 10%의 소비경제에 90%의 자산경제가 올라탄 형태로 구축되어 있다. 자산경제는 소비경제에서 발생하는 금리나 수수료로 성립되므로 소비경제가 약간만 변동해도 크게 움직인다. 지금 이 비율은 점점 더 커져 경제는 더욱더 불안정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오히려 소비를 하지 않게 되었고, 실제로 선진국에서 소비경제는 위축되고 있다. 미니멀리스트가 늘어나고, 유니클로나 No Brand(무인양품)처럼 싸고 좋은 제품을 구할 수 있으며, 돈이 많이 드는 차나 집은 사지 않고도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자본주의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에 균형을 잡고 싶어 하는 인간은, 아주 놀라운 풍요를 선사한 금융의 괴물 같은 힘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돈이 돈을 낳고, 그저 돈다발을 쌓아올리는 데 혈안이 된 세상에 사람들은 넌더리를 내고 다른 방안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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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자산경제가 점점 확대되고 있어, 전 세계에서 금융자본은 투자처를 찾아 헤매고 있다. 이율이 좋은 금융 상품이 없어졌기 때문에 돈은 있지만 투자할 데가 없는 상황이다. (자산 보유 계급의 이야기)


일본 기업의 사내유보금은 4천조 원을 초과하여 역대 최고가 되었고, 소프트뱅크는 사우디 정부 등에서 자금을 조달해 100조 원의 펀드를 만들고 전 세계의 테크놀로지 기업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 워런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도 100조 원의 현금을 어떻게 굴려야 할지 몰라 골머리를 앓는 중이다.




이처럼 자산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돈이 여기저기 정체되기 시작하여, 마땅한 투자처를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자금 조달이 용이한 환경이기 때문에 역으로 돈의 가치는 계속 떨어지고 있다. 그와 반대로 늘리기가 어려운 신뢰나 시간, 개성 같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의 가치가 올라가고 있다.


돈의 중요성이 그동안 지나치게 강조되었고, 돈이 안 되는 일, 재무제표에서 자산 취급을 못 받는 항목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떤 것은 누구도 존재 가치를 느끼지 못하지만 돈이 되기에 떠받드는 일마저 있었다. 이런 체제를 주도하는 자본가들과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치가 너무나 달라서 서로 위화감을 느끼게 되었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돈의 힘이 강해지고 사람들이 느끼는 가치와는 동떨어진 채 돈이 홀로 증식해갔다. 돈은 가치를 내팽개쳤고, 이에 반발한 사람들은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돈은 안 되지만, NGO나 NPO의 사회 공헌 활동이나 가치 있는 활동을 하고 싶어 한다.


IT 등의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생겨나자 여러 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문자는 전자화되며 긴 역사를 가진 종이를 여러 선택지 중의 하나로 만들었고, 가치의 교환도 전자적으로 처리되므로 기존의 '돈' 역시 가치를 매개하는 한 가지 수단으로 바뀔 것이다. 요컨대 돈이 유일한 수단으로 군림하던 '독점'이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가치를 보존, 교환, 측정하는 수단이 꼭 돈이어야 할 이유가 없어지고 있다.


국가 발행의 통화가 아닌 다른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가치를 교환할 수 있게 되면, 이용자는 가장 편리한 쪽을 선택할 것이다. 국가 발행의 통화이든, 기업이 발행하는 포인트이든, 비트코인 같은 가상통화이든 상관없다. 직접 만나 교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치'가 상품이라면, '돈'은 상품의 판매 채널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돈은 한 푼도 없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있고 페이스북 팔로어가 1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사업을 하려 한다면? 곧바로 타임라인에서 동업자를 찾고,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자금을 모으고, 필요하면 팔로어에게 지식과 경험을 빌릴 수 있다. 이 사람은 화폐로 환산하기 어려운 '다른 사람의 주목'이라는 가치를 필요할 때에 인맥, 돈, 정보 같은 가치로 전환할 수 있다.


10억 원의 저축과 100만 명의 팔로어 중 무엇이 더 나은지는 사람에 따라 달리 생각하겠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인터넷 덕분에 자신의 가치를 보존할 방법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북스의 <머니 2.0>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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