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인공지능은 착할까? 아니면 악할까?
송은주 작가의 책 <당신은 왜 인간입니까>는 ‘변화하는 세계를 SF문학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SF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으로 그려내는 일종의 사고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두 SF를 통해 인공지능의 미래를 상상하며 함께 살펴보자.
먼저 볼 SF는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아서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A Space Odyssey>이다.

 


우주선 디스커버리호에 5명의 대원이 탔다.
의식을 지닌 인공지능 컴퓨터 할 9000도 동승했다. ‘9000 시리즈는 가장 신뢰도가 높은 컴퓨터입니다.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단조로운 우주여행이 이어지는 도중 인공지능 할이 통신 안테나에 이상이 생겼다고 말한다. 두 대원이 안테나를 확인해봤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자꾸 안테나에 이상이 있다고 말하는 할. 급기야 지구와 통신이 두절되는 사태까지 일어난다.

두 대원은 할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고 의심하면서, 할의 기능을 정지시키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이를 알아챈 할이 반격에 나섰다. 통신을 재개하려고 나간 대원 하나를 캡슐과 충돌시켜 죽인다. 그리고는 동면 중인 세 대원도 죽여버린다.

마지막으로 남은 보먼만이 간신히 할의 기능을 중지시키는데 성공했다. 할은 탐사 성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탑승자를 무차별 살해하는 독보적인 악역 캐릭터다.
할이 만들어 놓은 인공지능에 대한 공포는, 이후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과 매트릭스 등으로 이어졌다.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가 이처럼 비극적일까?
할이 미쳐버린 이유는 모순된 명령 때문이다.
‘오직 할 9000만 우주 탐사의 진짜 목적을 알고 있었다.’

할은 탐사의 진짜 목적을 두 대원에게 숨겨야 하는 입장이었으나, 동료 대원들의 질문에도 대답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모순된 명령을 내린 지구와의 교신을 끊어버리든가, 아니면 진실을 숨겨야 하는 대상인 대원들을 제거하는 것뿐이었다.

 


책 <당신은 왜 인간입니까>는 인공지능이 악의를 갖고 인간을 해치려 하는 것이 오해라고 말한다. 인공지능은 어디까지나 주어진 목표를 이루기 위해 행동할 뿐이라는 것이다.

알고리즘으로 작동하는 인공지능에 우리는 인간의 관점을 투사하고, 그것이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의인화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 정해진 목적을 추구하며, 모순을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런 편견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더 올바르게 인공지능을 설계하고 관계를 설정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아이작 아시모프 Isaac Asimov의 소설 <바이센테니얼 맨 The Bicentennial Man>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에는 너무나 착한 인공지능이 나온다.
마틴의 집에 가사용 로봇이 배달된다. 마틴의 둘째 딸 어맨더는 가사용 로봇에게 앤드루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어느 순간 앤드루는 자신에게 공예품을 만드는 재주와 창조 욕구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틴은 앤드루를 대표로 하는 법인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앤드루가 수익을 낼 수 있도록 해준다. 로봇이지만 재산을 소유할 수 있게 된 앤드루는 자신의 신체를 인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바꾸는데 돈을 투자한다.
몇 년이 지나고 앤드루는 가족을 위해 계속 봉사하겠지만 자유를 달라고 마틴에게 말한다.

결국 앤드루는 역사상 최초의 자유 로봇이 된다. 그 후로도 앤드루는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간다. 인공장기를 개발하는가 하면 자신의 수명을 제한하면서까지 인간과 같은 권리를 얻고자 한다.
작가 아시모프는 앤드루를 인간을 닮고 싶어 하는 인공지능으로 설정함으로써, 사람들이 기계에 대해 갖는 두려움과 공포를 없애려 했다.

그리고는 ‘인공지능에게 의식이 있다면, 인간과 같은 권리를 줘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권리를 인정해주는 하나의 기준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하지만 로봇에게 여러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감정은 신체를 통해 체현되기 때문이다.

절대 부서지지 않는 티타늄으로 만들어진 로봇은 사람과 같은 공포나 고통을 느낄 수 없다. 프로그래밍으로 두려운 척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이런 로봇을 원하는 걸까?
로봇이 불길이 치솟는 화재 현장에서 무서워서 들어가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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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로봇에 감정을 부여한다는 SF의 공상은 매력적이지만, 감당하지 않아도 될 온갖 골칫거리가 따라올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미래의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와 다른 존재들을 마주할 것이다.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 기계를 몸에 이식한 사이보그, 기계에 의식을 업로드한 기계인간까지.
이런 존재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책이 소개하는 여러 SF 이야기를 통해 다른 존재들과 어떻게 공존하면 좋을지 사고실험에 참여해보자.

송은주 저 <당신은 왜 인간입니까 : AI 시대, 우리를 기다리는 섬뜩한 질문> <책그림>을 참고

그 작품은

내 생명의 피로 쓴 것이라.

- J.R.R. 톨킨 -


1930년대 초, 옥스퍼드대 영문학 교수였던 톨킨은 학생들의 과제를 검사하던 중, 우연히 백지 한 장을 발견했다. 순간적으로 그는 그 종이에 짧은 한 문장을 적는다.

'땅속 어느 굴에 호빗이 살고 있었다. In a hole in the ground there lived a Hobbit.'

모든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현대 판타지의 기본 공식 = 오크, 엘프, 드워프

이 모든 것을 만든 작가 J.R.R. 톨킨


이후 그는 자신이 생각해낸 '호빗'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매우 정교하게...

톨킨이 글 쓰는 것보다도 먼저 만들었던 것은, 호빗이 사는 세상 '샤이어'의 지도였다.

어느 날 문득 적었던 한 문장으로부터 6년이라는 집필 기간 끝에 호빗의 이야기는 세상에 나오게 된다.




이야기의 치밀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속 인물들의 생생한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다 보면, 마치 톨킨이 샤이어에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언어학 재능으로 '엘프어'를 만들고, 인물들은 각자의 생활방식과 성향을 가진 하나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었다.


소설가 톨킨은 어느새 '중간계(땅과 하늘의 가운데 땅)'를 창조하고 있었다.

<호빗>에 대한 반응은 정말 뜨거웠다. 출간 이후 3개월 만에 책은 완판되었다.

곧이어 톨킨은 중간계의 두 번째 이야기를 준비한다.


호빗 이전의 중간계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 호기심으로 만들어진 두 번째 이야기, '실마릴리온'이다.

중간계를 포함한 '아르다' 전체의 역사와 신화를 다루는 방대한 이야기가 탄생한다.

그러나 예상외로 차가운 독자들의 반응으로 <실마릴리온>은 출판조차 되지 못했다.


그 <실마릴리온>이 환영받지 못한 이유는, 호빗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호빗'이라는 매력적인 존재 때문에 이야기를 읽었던 것이다.

다시 호빗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지만, 새로운 이야기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수년간 톨킨의 새로운 책은 나오지 않았다.



포기하려고 했던 톨킨... 그때 톨킨을 끊임없이 격려하고 칭찬해준 친구 C.S. 루이스.

10년이라는 긴 시간 끝에 마침내 출간된 중간계의 3번째 이야기, <반지의 제왕 The Lord of the Rings>.

'20세기 판타지 문학의 정점을 찍다.'


1973년 톨킨이 사망한 이후, 그의 아들 크리스토퍼 톨킨이 원고를 정리하여, 1977년 비로소 <실마릴리온>은 세상에 나오게 된다.

친구 C.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로, 어린이 판타지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톨킨이 '중간계'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던 진짜 이유는, 오랜 전쟁의 역사와 기록의 부족 때문에 제대로 된 '신화'가 없었던 영국을 위해, 톨킨은 영국의 신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


그의 '중간계' 이야기는 근현대 영국을 대표하는 '신화'로 자리 잡았다.

조만간 톨킨과 루이스 두 판타지 작가의 특별한 우정을 정리해서 포스팅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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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4 - [선각자의 유언] - 이유있는 우정의 비밀,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



TV 속 연예인들의 줄 이은 고백 때문인지, 요즘은 예전에 비해 누구나 우울증증상을 가지거나 정신병에 걸릴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겼다. 또 치료하려는 시도도 늘고 있다.


다양한 정신질환 중 특별한 이유 없이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는 극단적인 우울증증상과 불안을 내보이는 공황장애가 있다. 이 질환이 두려운 진짜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정신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인데, 전문가들은 공황장애증상을 가진 사람의 30~50%는 광장공포증이 올 수 있다고 말한다.


바깥이 두려운 사람들, 광장공포증.

남들이 두려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가 중심이고 싶은 사람들이기도 하다.



광장공포증은 공황 현상이 왔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없거나 피할 수 없을까 봐 쇼핑이나 운전, 교통수단 이용, 장거리 여행 등을 피하는 경우이다. 심한 경우 집 바깥에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해, 집에서만 지내고 사회적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


광장공포증 : 남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것.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다'라는 착각.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광장공포증에 걸린 사람은 남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와는 반대로 모두에게 주목받고 세계의 중심에 서기를 간절히 바라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집에 틀어박혀서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 이들은, 가족 모두 자신을 배려하고 물심양면으로 봉사해주는 가족과 반려동물 사이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반면 모르는 사람으로 가득한 바깥 세계에서는 아무도 자신을 주목해주지 않는다. 그게 겁나고 두려운 것이란다.


광장공포증에 걸린 사람은 실은 모두에게 주목받고 세계의 중심에 서기를 바라는 것이다.

소속되고 싶은 vs 세계의 중심에 있고 싶은 욕구.

그들은 얼핏 보면 가정에 소속감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다는 욕구와 세계의 중심에 있고 싶다는 욕구는 별개의 것이다.


어릴 때 응석을 부리며 부모에게 무엇이든 받으며 자란 아이는 커서 타인에게 받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고, 타인이 자신에게 무엇을 해주는지에만 관심을 갖는 어른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다른 사람이 해주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한 번이라도 그렇지 않은 현실에 직면하면 기분 나빠하고 때로는 공격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광장공포증이 아니더라도 이런 성향은 주변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응석받이로 키워졌거나 상벌 교육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인정 욕구'가 생길 수 있다. 또 인정 욕구가 커질수록 '내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해줬으니 당신도 내게 뭔가를 해줘야 한다'라는 생각도 함께 커질 수 있다.


삶을 '기브 앤 테이크 give and take'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인데, 무엇보다 무서운 건 나를 세계의 중심에 두고, 내가 주는 만큼 받아야 하는 쪽으로 삶의 방향이 기우는 것이다.


끊임없이 인정받고 싶고, 인정받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 결국 인정이 아니면 누구 앞에도 나서지 못하게 되는 삶, 자신의 기대가 아닌 다른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삶을 살게 된다.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태도는, 타인이 아닌 나 스스로에 만족하는 삶을 위해서는, 주고받는 삶보다 주는 삶에 익숙해지는 게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태도는 타인이 내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나 역시 다른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다. 남들이 안 좋게 볼까 봐 두려워서 그들의 기대를 만족시키려는 사람은 자기 인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 인생을 사는 것이다.


내 인생을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과 갈등과 마찰을 빚기 마련이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생긴다. 하지만 내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면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사라질 것이다. 결국 타인의 인정이 아니더라도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 수 있다.


태도 둘. 과제를 분리하는 것이다.

어떤 일의 최종 결말이 누구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최종적으로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 지를 생각해보면, 그 일이 누구의 과제인 지 알 수 있다.


아이 공부 문제로 고민하는 부모를 생각해보자. 공부는 분명 부모가 아닌 아이의 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조바심이 나고 불안해 어쩔 줄 몰라 한다. 아이는 내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대상도 내가 주는 만큼 돌려받아야 하는 존재도 아니다.


다른 사람은 내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나 역시 다른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다.


기시미 이치로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를 참고


바쁘게 미친 듯이 열심히 살고 있는데, 도대체 왜 공허해지는 걸까?


당신이 많은 일을 이뤄내도 공허와 결핍을 느끼는 이유는, 소소한 일상을 놓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빠른 속도에 떠밀려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당신은 스스로의 감각과 느낌을 가져볼 기회를 잃어버렸다. 다시 말해 음미하는 생활을 상실한 것이다.


긍정심리학에서는 긍정성을 확장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음미하기'를 권한다. 추억이 깃든 사진이나 기념품을 걸어 두고, 그 순간을 잠시 떠올려보는 것. 그런 사소한 행위들은 긍정과 행복의 느낌을 확장하기 위한 의식적 활동인데, 이를 확실하게 뒷받침해주는 연구 결과가 있다.



프레드 브라이언트 심리학 교수는 사람들의 행복도 측정을 위해 세 그룹으로 나누어 실험을 진행했다.

A :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하며 음미하기

B : 그런 순간을 기념품을 보며 음미하기

C : 아무 기억도 음미하지 않기

이들 중 행복도가 가장 높았던 그룹은, 기념품을 보면서 기억을 음미한 'B그룹'이었다.


당신은 순간순간을 과연 얼마나 음미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는가? 빠르게 지나치는 시공간 속에서는 감각과 느낌을 차분히 음미해볼 수 있는 시간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어쩌면 비자발적으로 강요받은 일들을 처리하기 급급한 나머지, 천천히 느끼면서 은은하게 빠져보는 순간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음미한다는 것은 더 바쁘게 움직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군중 심리에 반응하다 빼앗긴, 자신의 '존재감'을 찾는 일과 같다. 음미는 자신의 존재를 소외시키지 않고, 자신에게 더욱 몰입하도록 도와준다. 또한 음미한다는 것은 스스로 선택하고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을 '동기부여'하는 행위와도 같다.


상상해 보라. 당신의 배우자와 딸이 함께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을... 해맑게 웃는 아이를 보는 순간 감사한 마음과 함께 행복감이 밀려오지 않을까? 아무리 바쁘고 지치더라도, 이런 소소한 순간들을 '의식적으로' 마주해야 한다.


나만의 숨겨둔 가치와 행복이 존재한다면, 팍팍하게 떠밀려 다니는 순간에도 당신은 얼마든지 현실을 밀고 나갈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하루 한 번만이라도 추억이 담긴 사진이나 기념품, 주변 사람들의 웃음, 해지는 노을, 햇빛에 살랑이는 풀잎을 보면서 음미하는 시간을 만들어 보라.



열심히 살고 있어도 공허해지는 이유는, 그동안 자신의 갈증이 아닌 다른 사람의 갈증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잊지 말자. 주변의 일상 속에서도 행복을 찾아 누릴 수 있는 시력과 감각을 갖게 될 때, 비로소 당신은 군중의 삶에서 벗어나 진짜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내 삶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
국내도서
저자 : 김권수
출판 : 책들의 정원 2017.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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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권수 김권수 <내 삶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 중에서




자주 쓰이는 말 '팩트폭행, 팩트폭력' =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팩트, 즉 모두가 인정할 만한 사실을 제시하며 잘못된 점을 꼬집어 설명하는 행위


폭행, 폭력이라 부르는 만큼, 때로는 상대에게 아프게 타격을 주기도 합니다. 맞는 말이기 때문에 딱히 반박할 수도 없지요.


이것의 시작은 엉터리 선동과 여론 조작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언론의 기사나 시국을 시원하게 꼬집고, 사람들에게 통쾌함과 웃음을 선사했지요. 조금은 긍정적인 의미로 일상생활이나 SNS에까지 많이 쓰이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외국에서 'Stop Using Facts!'라는 말이 먼저 유행되었습니다. 팩트폭행은 인터넷 여론의 자정 작용을 도와줍니다. 일부 정치인의 몰상식과 무능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에 '사이다 팩트폭격기'로 불리며 속을 후련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팩트폭행이라는 글이나 덧글을 보면, 가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그저 말로 남을 헐뜯고 깎아내리는 단순한 언어폭력마저도, 팩트를 제시했다는 것만으로 팩트폭행으로 둔갑하기 때문입니다.


폭행을 가한 가해자들이 팩트폭행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서, 오히려 자신은 사실만을 말하는 팩트폭격기(?)라며 의기양양해 합니다. 인터넷에서는 팩트폭행의 문제가 더 빈번하고 심각합니다. 오프라인과 달리 온라인에서는, 말이 관계를 쌓기 위한 도구가 아닌 대결의 도구가 되기 쉽습니다.


서로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 그리고 다시 안 봐도 될 수 있는 상황은 상대방의 기분을 고려할 필요가 없게 만들고, 앞에서는 하지 못할 말들을 거리낌 없이 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말은 도구로만 행세하고, 그 행위는 지식 자랑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팩트폭행은 말 그대로 사실만을 말하는 건데, 뭐가 문제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속에 내포된 2가지 의미를 살펴보죠.


1) '가르치기'와 '네가 틀렸어'

"그거 읽어본 적은 있냐? 가서 논문하고 책부터 좀 읽어보고 와라."

"해외서 몇 년 살아봐서 아는데, 괜히 아는 척하지 마라."

"뭣도 모르면서 글 쓰고 있네."


팩트를 제시한 것 같은데, '토론'이 아닌 '가르치기'가 됐군요.

원하지 않는 가르침은 상대방을 나보다 낮은 존재로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결국은 네가 틀렸으니, 내가 가르쳐주겠다는 의도지요. 가르치는 것은 오직 상대방이 가르침을 원할 때 뿐입니다. 원하지 않는 가르침은 조언이 아닌 '폭행이나 폭력'이기 쉽지요.


2) 인신공격

"꼭 머리 나쁜 애들이 저런 말하더라."

"애인도 없이 집에 처박혀 있는 애들이 아는 척한다."

"사회문제에 관심도 없는 애들이 있어 보이려고 덧글 쓰지."


우리는 가끔 상대방의 의견이 잘못된 경우, 그 의견을 비판하지 않고 상대방을 비난합니다. 상대방이 무식하고 몰상식하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의견이 나온다는 '인신공격'으로 연결됩니다.



그렇지만, 그의 의견이 틀렸다고 해서 그가 부족한 사람은 아닐 겁니다. 우리 모두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선동에 취약하고 공부도 부족하지요. 누구나 처음부터 팩트를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가끔은 팩트라는 어떤 사실이 뒤바뀌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잘못된 주장을 한다면 그 주장을 비판해야지요. '네가 틀렸어'가 아니라, '네 의견이 틀렸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팩트폭행은 무엇일까요? 과연 올바른 팩트폭행이란 게 존재나 할까요?

토론이나 언쟁의 목적은, 자신이 올바르다 생각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제시해 상대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내 주장에 수긍하고, 내 논리를 이해하고, 내 방향에 공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럴 때 팩트폭행을 하면서 상대를 깎아내리고, 무시하고, 비난하면, 상대방은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보호하려 하지요. 자신의 주장과 자존심을 동일시하면서 반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팩트폭행은 도덕성의 문제를 넘어서,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자제 되어야 한다고 보입니다.


반론 할 때 내 목적을 먼저 생각해 봅시다.

비웃는 말투, 문제를 벗어난 인신공격, 남을 가르치려는 태도가 내 목적에 부합하나요? 내 목적이 그들을 낮춤으로써 나를 높이는 것인가요?


각자의 삶에서 개개인이 추구하는 가치나 생각이 일치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상대를 팩트로 폭행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걸까요?


온라인상에서 팩트폭행이라는 명목하에 남을 깎아내리는 것이 영웅시 된다면, 일상에서조차 말로 남을 폭행하는 사태가 더 빈번해지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상대방에게 굴욕감을 주기 위해 팩트를 남발할까 두려워집니다.


팩트라는 것만으로 잘못된 목적이 정당화될까 봐 걱정됩니다. 말이 가진 힘은 굉장히 커서, 말을 어떻게 하느냐가 곧 자신을 규정하게 됩니다.

말은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은 인격이 됩니다.


우리가 '팩트폭행'을 시원하다라고만 생각하며 당연시 여기게 된다면, 그다음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 모두 다시 한번 생각해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사람들과, 그저 꿈만 꾸는 사람들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차이점은 기꺼이 실패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이고, 부딪혀 깨지고 불태울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기도 하지요.


야망을 가지고 성공하기를 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건 단지 욕망일 뿐이지요. 꿈을 위해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나요? 실제로 중요한 것은 이상향 도달에 실패함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정의하게 되고, 그 실패가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 우리 스스로를 얼마나 우울하게 만드나요?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느라, 얼마나 많은 인생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지 아십니까? 가끔 살다 보면 우리가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없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꿈을 찾아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실망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많은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겠지요. 또 많은 고통도 마주할 것입니다. 좌절도 있고 패배도 있겠지요.


우리는 살면서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현재가 미래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믿어야지요. 신, 운명, 인생, 카르마 등 뭐가 됐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재가 미래로 연결된다는 믿음이, 우리의 마음이 따라갈 자신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험한 길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인생의 모든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여러 훌륭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그중에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도 실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사랑하는 일에 도전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그 일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으세요. 그리고 현실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그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타인의 생각의 결과물에 불과한 함정에 빠지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내 내면의 목소리를 삼키지 못하게 하세요.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의 가슴과 영감은 진정 원하는 바를 알고 있습니다. 실패해도 다시 시도한다면, 그리고 또다시 시도한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지요. 절대 마지막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인생이란 건 결국 난타전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센 주먹을 날리느냐가 아니라, 끝없이 맞으면서도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계속 전진하는, 그게 바로 진정한 승리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겁낼 필요가 없지요. 그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입니다. 꿈을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그리고 항상 웃음 짓도록 하세요. 가다가 넘어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냥 다시 일어서면 되는 겁니다.


때로는 우리가 넘어질 수 있습니다. 반드시 넘어지지요. 우리는 자신의 길에 대해 의문과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지 않겠지만 그 실패를 받아들이고 잘 다루기만 한다면, 실패는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알지 못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위대함을 깨닫게 될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Don't Give Up" 중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정작 모인 돈은 없을 때, 수많은 건물 중 내가 지낼 제대로 된 방 하나 없을 때, 우리는 세상이 불평등하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불평등을 더 느낄수록 수명까지 짧아지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고 말하는 책이 있습니다.

오늘은 <부러진 사다리>를 소개합니다.


사다리는 불평등을 이야기할 때 자주 쓰이는 은유입니다. 사다리의 높은 층은 더 나은 지위와 소득, 안정, 미래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높은 층에 올라가기 위해 애를 쓰지요. 물론 열심히 일할수록, 능력이 있을수록, 더 대우를 받아야 하기에 사다리는 필요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사다리 간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생깁니다. 현대의 사다리는 밑에서 시작했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위 사다리로 올라갈 수 없는 구조가 되었습니다. 사다리 손잡이가 중간쯤에서 몇 개 부러지고 없어진 것이지요. 사람들은 신세 한탄을 해보기도 하고, 나라 탓을 해보기도 하다가, 결국 체념하고 하루를 살아갑니다. 


스스로 흙수저라 부르며 쓴웃음을 지으면서 지나치기도 하지요. 하지만 불평등은 생각보다 더 깊숙이 우리 내면에 침투합니다. 가끔은 나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며, 개인과 사회를 병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비행기를 한번 보죠. 비행기는 사다리가 물리적으로 구현되어 있는 공간입니다. 맨 위에는 일등석이 있고, 넓은 좌석, 맛있는 음식, 여유로움이 있지요. 그 밑에 비즈니스석이 그리고 그 밑에 이코노미석이 있습니다. 


연구진이 신기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일등석이 존재하는 항공편이, 모든 좌석이 동일한 항공편보다 기내 난동 발생률이 4배나 높다는 것입니다. 특히 비행기를 탑승할 때 일등석을 지나쳐서 입장해야 하는 경우, 기내 난동 발생률이 또 2배 높아졌습니다. 


일등석 사람은 먼저 탑승해서 편히 쉬고 있는데, 나는 무거운 짐을 질질 끌면서 그 옆을 지나칠 때, 우리는 불평등을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코노미석의 승객들도 비행기를 탈 정도이기에, 그들이 정말로 가난한 상태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요. 


가난과 불평등은 다른 문제입니다. 

불평등이 심해지면 실제로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빈곤감을 느낍니다. 일등석을 마주친 이코노미 승객들처럼 말이지요. 


소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그래프로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각국의 1인당 소득과 건강, 사회문제 지수를 비교해보면, 특정한 패턴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득불평등과 건강, 사회문제 지수를 비교하면, 명확한 패턴이 발견됩니다. 불평등할수록 건강이 나빠지고 사회문제가 심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왜 불평등과 같은 추상적인 요인이, 건강과 같은 신체적인 문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걸까요? 실험과 연구 끝에 저자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불평등은 사람이 더 큰 위험을

감수하게 만들고,

빨리 살고 일찍 죽자 식의

충동적인 인생을 강요한다.



생명체는 주변 환경이 나쁠수록 지금 당장 먹을 수 있는 것, 즉시 가질 수 있는 것에 집착합니다.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오늘 하루 잘 사는 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오늘의 100달러를 받는 것과 다음 주에 150달러를 받는 것을 선택하라고 하자, 자신이 가난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대부분 오늘의 100달러를 선택했습니다. 불평등, 즉 내가 가난하다고 느끼는 감정이 우리를 즉각적인 만족, 충동적인 행동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불평등이 심한 곳일수록 사람들이 마약과 알코올을 남용할 확률이 높으며, 흡연, 과식, 운동 부족 비율이 높다고 합니다. 결국 불평등에 따라 사람의 수명까지 달라집니다. 이 그래프는 미국과 캐나다의 각 주별 사망율과 소득 불평등에 따라 그린 것입니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망률이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여기 그래프에 나온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한 곳인 미국에 사는 사람들이죠. 그러나 비교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더 잘 사는 사람과 비교한 미국인들은, 스스로를 사다리의 밑바닥으로 던져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가난한가 부유한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을 사다리의 밑바닥으로 억지로 던져 넣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부러진 사다리>는 상향 비교와 하향 비교를 적절하게 사용하라고 말하고 있지요. 

비교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매일매일 비교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자는 차라리 현명하게 비교하라고 말하고 있네요. 


자신보다 나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을 주기에 필요하지요. 하지만 이런 상향 비교는 사람을 지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마음이 허전하거나 우울해진다면, 자신이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전에 더 부족했던 자신을 떠올리면서, 지금 많이 나아졌다는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한 편으로는 부서진 사다리를 고치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부의 평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심한 불평등은 줄이자는 것입니다. 


적어도 사다리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먹고 노력한다면,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의 높이, 그 정도의 사다리를 만들어보자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정치적 성향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사회의 건강과 개인의 건강을 위한 문제입니다. 


<부러진 사다리>는 말합니다.

불평등은 생과 사의 문제이다.


여러분도 부러진 사다리를 마주해 좌절한 적이 있으셨나요? 우리는 이 사다리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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