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가능한 상대방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상대방 기분을 나쁘게 해 그들과 갈등을 겪거나 주눅들게 하면, 여러 정신적 피해와 그에 따른 손실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생활 속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어쩔 수 없이 싫은 소리를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일을 그렇게 처리하면 어떡해?’
‘넌 왜 말을 그렇게 하니?’
‘얘가 노력을 안 하니깐 말이야…’

상대방의 기분을 감안해서 이런 말은 자제하고 칭찬을 해주다 보면,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기분을 해치지 않고 현명하게 주의를 줄 수 있을까?

 


먼저 비판 전에 갖춰야 할 3가지 요소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상대방과의 관계와 신뢰의 정도이다.
비판 대상자와 어떤 관계냐에 따라 비판의 형식, 종류, 목적 등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만약 그 관계의 신뢰감이 높으면 비판 강도가 어느 정도 강해져도 상관없지만, 신뢰감이 낮거나 서로의 경험 차이가 거의 없다면, 비판을 삼가고 공감하는 방향으로 대화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

두 번째는, 정확한 문제의 파악이다.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는 비판은 해결은커녕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며, 관계의 악화 같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일례로 직장의 팀장이 자신의 팀원을 질책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데, 몇몇은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 못한 채 실적 부진을 개인의 능력 부족이나 나태함으로 생각해 비난하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지 않는 비난은 듣는 사람의 반감을 일으킨다.

마지막 요소는 감정 분리이다.
다양한 연구를 통해 사람의 행동과 감정은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즉 자신은 좋은 마음에서 시작한 비판이라도 계속되다 보면 어느새 감정이 격해져, 문제와 관련 없는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이나 성격의 지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비판이나 지적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을 차분히 하고, 사실과 감정을 분리해서 문제 그 자체만을 거론할 수 있는 마인드셋을 만들어야 한다.

 

 


3가지 준비에 더해 비판의 충격을 효과적으로 줄이는 2가지 테크닉은 다음과 같다.

먼저 상대방의 상황 설명을 끝까지 들어주고 절대 말을 끊지 말라.
비판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상황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특히 변화가 심한 현장과 비즈니스의 특성상, 보는 사람에 따라 당시의 상황은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많다.
상대방 스스로 분석한 문제의 원인, 해결책 그리고 대비책 등을 차분히 들으면서 놓친 것이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두 번째로 자신도 완벽하지 않은 존재임을 강조하면서 비판을 시작하라.
비슷한 상황에서 자신도 충분히 실수할 수 있음을 말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드러내면, 비판 과정의 반감을 어느 정도 줄이고 상대방에게 개선할 수 있다는 용기를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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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비판이나 지적은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곤욕스럽고 불편한 것이다.
하지만 올바른 생각과 방법을 통해 상대방으로 하여금 비판을 질책이 아닌, 함께 방법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라고 느끼게 한다면, 언젠가 상대방은 감사를 표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데일카네기 인간관계론>을 참고

맘에 드는 사람이 있는데 말 한마디 걸지 못할 때, 어떤 제스처를 발휘해야 호감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이럴 땐 다음과 같은 '작은 부탁'을 하는 게 좋다고 한다.

'잠시만 도와주시겠어요?'

'이것 좀 잠깐 봐주실래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김범준 씨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자기를 도와준 사람보다는 자기가 도와준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벤저민 프랭클린 효과'라고 합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과학자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틈만 나면 자신을 험담하는 어떤 의원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상대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었지만 비굴하게 몸을 굽혀 호감을 사기는 싫었고, 적당한 말로 화해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이때 프랭클린은 한 가지 묘수를 생각해 냈다. 그 사람이 대단히 희귀한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 책을 빌려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는 일주일 후에 감사하다는 편지와 함께 책을 돌려주었을 뿐이었는데, 상대는 이전보다 훨씬 정중한 태도로 프랭클린을 대했고, 이후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각별한 우정을 나누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런 명언을 남겼다.

적이 당신을 돕게 되면 나중에는 더욱더 당신을 돕고 싶어 하게 된다.


이런 효과가 발생하는 이유는 보통 심리적 갈등이 생겼을 때 없애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싫어하는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면 그 사람은 마음에 혼란이 온다.

'나는 저 사람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부탁을 들어주는 거지?


이렇게 행동과 마음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면 대부분 이 갈등을 없애고 싶어 하며, 이럴 경우 부탁을 거절하거나 상대를 싫어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사소한 부탁을 거절하면 소심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으니, 사람들은 부탁을 거절하기보다는 상대를 호의적으로 대하는 쪽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적당한 제스처를 발휘하면 아무리 껄끄러운 적이라도 자신을 돕는 친구로 만들 수 있다.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에게도 이 방법은 효과적이어서, 나를 향한 관심과 호감을 동시에 얻을 수도 있다. 그리고 호의는 또 다른 호의를 부르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사람은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좀 더 어려운 부탁도 선뜻 들어주는 경향이 있는데, 호의에 보답하는 것만큼 자연스럽고 정당한 이유도 없다.

'저번에 도와줘서 고마워요. 제가 밥 한 끼 사도 될까요?'


이런 제스처를 발휘해 부탁이 오가다 보면, 상대는 더 큰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고 당신과 더 많은 교류를 이어갈 수도 있다.


미워하는 사람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접근하면 결국은 상처를 내는 파괴적 결론만 나온다. 특별히 호의를 베푼 것도 아닌데 호의를 베푼 것처럼 느끼게 하는 제스처를 발휘해야, 당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던 사람의 마음까지 흔들 수 있게 된다.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다면,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과 화해하고 싶다면, 이제 용기를 가지고 이렇게 말해보자.

'부탁드릴 게 있는데 말씀드려도 될까요?'

김범준의 <저도 눈치 없는 사람과 대화는 어렵습니다만>



요즘 젠더 간의 갈등이 한창이다.

남성 혐오주의와 여성 혐오주의가 일상적으로 뉴스에 단골 손님으로 등장하며, 과격 시위뿐 아니라 폭력까지 발생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 자신들의 성별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똘끼 충만한 자들도 나타나고 있다. (우기면 더 우월해지나?ㅋㅋ) 젠더 간의 충돌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인류의 과거 양상과는 꽤 다른 모습이다.

인류는 많은 갈등과 싸움을 거치면서 역사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그 갈등과 싸움의 원인이 지금처럼 성별이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지배계층은 남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여성은 수동적인 위치에서 조용히 역할을 다 하고 있었다. 정치인, 고위 관료, 법관, 성직자 등 사회의 상류층은 거의 남성의 차지였다. 이는 서구세계뿐만 아니라 유교 중심인 동양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현대에는 많은 국가에서 남존여비 사상이 사라졌다. 대놓고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말하는 경우도 별로 없다. 이런 차이의 원인을 문화적, 종교적 영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문화적, 종교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위에 있다라는 개념이 계승되면서, 우리들의 관습과 행태에 뿌리깊게 박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수만 년간 유라시아 대륙, 단절되어 왔던 아메리카 신대륙, 그리고 태평양의 많은 섬들의 원주민 사회 대다수도 남성 중심 사회였다.

즉, 인류가 나타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남성이 더 우월한 지위를 갖춘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남성이 더 사회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던 세 가지 이유와, 이에 대해 유발 하라리가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말한 반박까지 함께 살펴보자.


1) 근력의 차이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힘이 세기 때문에 남성이 완력으로 여성을 굴복시켰거나, 남성이 더 힘든 일을 함으로써 더 큰 영향력을 가져갔다는 분석이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논리지만, 유발 하라리는 육체적 힘과 사회적 권력은 서로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비판한다.


오히려 과거 여성들은 근력이 필요 없는 정치인, 성직자, 법률가라는 직업보다는 신체 노동이 많은 가사일, 수공예, 들일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20~30대 청년들이 60~70대 연장자들보다 힘이 훨씬 셈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힘은 연장자들에게 있다.



2) 남성의 공격성과 폭력성

이런 공격성으로 인해 남성은 전쟁을 일삼았고, 전쟁에서의 영향력을 자연스럽게 사회적 영향력으로 가져가면서 남성 중심의 사회가 펼쳐졌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는 군대에서의 지휘관과 사병의 필요 덕목이 다른 점에 주목한다. 군대에서의 장교나 지휘관은 체력이나 공격성보다는 조직력, 협동력, 유화책 등의 지혜로움이 더 중요시 된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군대에서 지휘관은 거의 귀족, 부유층 등에서 잘 교육받은 자들의 몫이었고, 하층민들이 주로 사병 역할을 맡았다. 공격적이고 폭력적이어야만 지휘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3) 출산과 관련한 번식 전략의 차이

남성은 여성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해야 하고, 그런 경쟁에서 이긴 남성의 유전자만이 살아남는다. (인간도 하나의 유전자 운반체라는 개념이 포함됨.) 반면 여성은 임신기간과 양육기간에 식량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식량을 가져다 줄 남성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고, 헌신적이고 순종적인 유전자가 후대에 전해진다는 이야기다.


남녀의 생존전략이 달랐기 때문에 남성은 야심 있고 경쟁적인 성향을 띄는 반면, 여성은 아이를 돌보고 키우는 경향이 컸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발 하라리는 동물들의 세계를 보면 수컷과 암컷의 생존전략에도 불구하고 모권 중심 사회가 나타난 종이 많다고 한다.


암컷들은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회적 기술을 발달시켜, 협력과 설득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서로 돕고 새끼를 키운다. 그러나 수컷들은 싸우고 경쟁하는데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결국 협력적인 암컷 위주의 강력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자기중심적이고 비협력적인 수컷들은 변방으로 밀려난다는 분석이다.


그러면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

다소 허무한 결말이지만, 유발 하라리는 ‘모르겠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한 출판사가 진행한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흔히 질문으로 시작은 하지만, 곧바로 자신만의 이론을 개발하여 자신이 물었던 질문보다는 자신의 이론을 방어하는데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즉,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고, 그 답을 방어하기 위해 논리와 이유를 전개한다는 것.

모르는 것은 그냥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명확성이 배가되고, 무지를 덮기 위한 구차한 설명은 시작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장 현명한 철학자로 기억되고 있으며, 공자 역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누구의 말이 보다 타당성이 있어 보이나?


<BetterLife>를 참고




TV 속 연예인들의 줄 이은 고백 때문인지, 요즘은 예전에 비해 누구나 우울증증상을 가지거나 정신병에 걸릴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겼다. 또 치료하려는 시도도 늘고 있다.


다양한 정신질환 중 특별한 이유 없이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는 극단적인 우울증증상과 불안을 내보이는 공황장애가 있다. 이 질환이 두려운 진짜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정신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인데, 전문가들은 공황장애증상을 가진 사람의 30~50%는 광장공포증이 올 수 있다고 말한다.


바깥이 두려운 사람들, 광장공포증.

남들이 두려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가 중심이고 싶은 사람들이기도 하다.



광장공포증은 공황 현상이 왔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없거나 피할 수 없을까 봐 쇼핑이나 운전, 교통수단 이용, 장거리 여행 등을 피하는 경우이다. 심한 경우 집 바깥에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해, 집에서만 지내고 사회적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


광장공포증 : 남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것.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다'라는 착각.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광장공포증에 걸린 사람은 남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와는 반대로 모두에게 주목받고 세계의 중심에 서기를 간절히 바라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집에 틀어박혀서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 이들은, 가족 모두 자신을 배려하고 물심양면으로 봉사해주는 가족과 반려동물 사이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반면 모르는 사람으로 가득한 바깥 세계에서는 아무도 자신을 주목해주지 않는다. 그게 겁나고 두려운 것이란다.


광장공포증에 걸린 사람은 실은 모두에게 주목받고 세계의 중심에 서기를 바라는 것이다.

소속되고 싶은 vs 세계의 중심에 있고 싶은 욕구.

그들은 얼핏 보면 가정에 소속감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다는 욕구와 세계의 중심에 있고 싶다는 욕구는 별개의 것이다.


어릴 때 응석을 부리며 부모에게 무엇이든 받으며 자란 아이는 커서 타인에게 받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고, 타인이 자신에게 무엇을 해주는지에만 관심을 갖는 어른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다른 사람이 해주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한 번이라도 그렇지 않은 현실에 직면하면 기분 나빠하고 때로는 공격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광장공포증이 아니더라도 이런 성향은 주변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응석받이로 키워졌거나 상벌 교육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인정 욕구'가 생길 수 있다. 또 인정 욕구가 커질수록 '내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해줬으니 당신도 내게 뭔가를 해줘야 한다'라는 생각도 함께 커질 수 있다.


삶을 '기브 앤 테이크 give and take'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인데, 무엇보다 무서운 건 나를 세계의 중심에 두고, 내가 주는 만큼 받아야 하는 쪽으로 삶의 방향이 기우는 것이다.


끊임없이 인정받고 싶고, 인정받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 결국 인정이 아니면 누구 앞에도 나서지 못하게 되는 삶, 자신의 기대가 아닌 다른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삶을 살게 된다.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태도는, 타인이 아닌 나 스스로에 만족하는 삶을 위해서는, 주고받는 삶보다 주는 삶에 익숙해지는 게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태도는 타인이 내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나 역시 다른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다. 남들이 안 좋게 볼까 봐 두려워서 그들의 기대를 만족시키려는 사람은 자기 인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 인생을 사는 것이다.


내 인생을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과 갈등과 마찰을 빚기 마련이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생긴다. 하지만 내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면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사라질 것이다. 결국 타인의 인정이 아니더라도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 수 있다.


태도 둘. 과제를 분리하는 것이다.

어떤 일의 최종 결말이 누구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최종적으로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 지를 생각해보면, 그 일이 누구의 과제인 지 알 수 있다.


아이 공부 문제로 고민하는 부모를 생각해보자. 공부는 분명 부모가 아닌 아이의 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조바심이 나고 불안해 어쩔 줄 몰라 한다. 아이는 내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대상도 내가 주는 만큼 돌려받아야 하는 존재도 아니다.


다른 사람은 내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나 역시 다른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다.


기시미 이치로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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