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중세시대 고색창연한 성(城)에서의 삶을 낭만적이고 간지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과연 그 생활이 그런지 한번 알아보자.

늘 그렇지만 진실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또한 추한 것도 사실이다.

 

연회, 아름답고 폼 나는 의상, 영주와 귀족들, 궁정의 광대 등을 많이 연상하는 것 같다. 모두 영화나 TV 쇼, 광고 등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중세의 삶이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화려한 그림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마도 충격받을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도 성의 내부는 우리가 여행 책자에서 보는 웅장하고 고고한 자태나 자랑스러운 건축물과는 전혀 다르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좁은 통로, 질식할 정도로 자욱한 연기가 나는 불, 음침하고 어두운 방, 중세시대의 성에 발을 들여 놓았다면, 이런 것들이 당신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건 그나마 좀 낫다.

 

 

우선 상황을 보면, 성 내부는 얼음처럼 차갑다.

놀랄 일도 아닌 것이, 성은 적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건축물이지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지은 게 아니었다. 지을 때 사방에 거대한 돌로 요새를 건설한 것도 생존과 수비, 싸움을 위한 목적 때문이다.

더운 날에도 돌은 쉽게 뜨거워지지 않는다. 게다가 적의 침입에 대한 안전을 위해 창문은 작고 좁기 때문에 햇빛이 별로 들어오지 않는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해보면 성은 차갑고 어두운 방이 있는 거대한 돌 상자나 마찬가지다.

 

영주와 귀족의 가족은 불을 지펴 그들의 침실을 따뜻하게 했겠지만, 하인들은 성에서 가장 깊고 추운 곳에서 웅크리고 지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이 끊임없이 병을 앓았고 쉽게 털고 일어나지도 못했다.

성에서는 사생활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 많은 환경을 잘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성에 사는 걸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은 비록 밖에서 볼 때는 접근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내부는 말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열린 공간이다.

영주나 귀족들은 자기들만의 공간에서 자고 먹고 옷을 입으며 편히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밤낮으로 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해야 했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인생 고민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주변에는 늘 누군가가 있었을 테니…

 

화장실조차도 홀로 고독을 즐길 수 없는 민망한  공공장소였다.

민감하지만 충격적인 사실은, 우선 중세식 변기는 기다란 나무 벤치에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 위에서 볼일을 해결해야 했다. 벽도 칸막이도 없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의 중국의 공공화장실과 비슷한 상태였다.

언제든지 여러 사람이 함께 일을 봤고, 게다가 모든 배설물은 그저 큰 오물통으로 떨어지면 그냥 그대로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중세에는 사생활과 위생에 대한 기준이 매우 달랐다는 것만 기억하자.

 

오물통에 모인 모든 것들은 악취를 일으켰다. 그 때문에 성은 정말 냄새가 심각하게 지독했다. 사람들은 위생에 신경 쓰지 않았고, 심지어 목욕할 형편도 안 될 때가 많았다. 욕조와 깨끗한 물은 높은 계층만이 사용할 수 있었고, 아무도 화장실 아래에 있는 거대한 오물통을 청소할 만큼 용감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성에 사는 사람들은 끊임없는 악취에 익숙해져야 했다.

 

보통 성에는 100명 이상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좋아하면 괜찮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갑지 않아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성에 살았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거대한 성의 모든 잡일을 처리하기 위해 그 많은 하인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영주나 귀족의 가족들을 돌볼 사람들까지, 그 결과 하인들과 그 가족들은 초만원인 숙소에 살면서 그들이 가진 거의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밖에 없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또 극도로 불쾌한 이웃과 주거공간을 공유해야만 했다. 어둡고 춥고 축축한 공간을 좋아하는 서생원 쥐 말이다. 성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쥐는 영원한 인생 동반자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쥐에 익숙해져서 무시하거나 적응했을 것 같지만 전혀 아니올시다. 그 시대 사람들도 대부분의 현대인들처럼 쥐에게 두려움과 혐오감을 느꼈다고 한다.

 

중세 성에서의 하루는 일출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햇빛이 거의 유일한 빛의 원천이어서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햇빛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하인들은 부엌에서 불 피우고 아침을 준비하려면 해가 뜨기도 전에 기상해야 했다.

 

왕족이나 귀족의 하루는 상당히 달랐다.

우선 영주와 귀부인들은 늦잠을 자고 싶으면 자도 되고, 그렇지 않다면 새벽에 일어나 기도 의식에 참여하고 아침식사로 흰빵과 와인을 먹곤 했다. 그러고 난 후 영주는 필요한 회의를 하고 부인은 자수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성에 손님이 없으면 오전 10시경에 점심식사가 차려지고 6개 정도의 요리를 먹었다. 점심식사 후는 오락시간이라 사냥이나 체스게임을 하며 보냈다.

 

늦은 오후 영주의 가족과 손님들은 저녁을 먹고는 떠돌이 음유시인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리고 대장이 잠자리에 들겠다고 하자마자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영주나 귀족들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목욕을 할 수도 있었다. 중세 사람들이 거의 씻지 않는 것은 목욕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목욕 준비가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깨끗한 물을 찾기가 어려웠고, 목욕을 하기 위해서는 욕조가 필요한데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보통 큰 나무통을 방마다 끌고 다니면서 목욕을 하는데 사용했다.

짐작하겠지만 위생적이지도 않았고 사생활도 보장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매우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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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나 파티는 많고 빈번했다. 큰 홀에서 행사를 했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에 따라 앉아야만 했다. 손님들의 음식 선택권은 그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에 달려 있었다.

영주의 가족과 VIP 방문객들은 절묘한 양념으로 조리한 고급요리를 즐겼다. 덜 중요한 손님들의 경우 그들의 자리는 식탁의 상석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음식은 맛있고 배도 든든하게 해주지만 훨씬 더 단순했다.

 

행사가 끝나면 바닥은 남은 음식물과 기름 찌꺼기 그리고 다른 쓰레기로 덮여 있었다. 지금 같은 식사 예절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그들은 어떻게 하면 청결한 인상을 줄지는 잘 알고 있었다.

약초와 갈대로 바닥을 덮어서 나중에 기름과 액체를 흡수하도록 했다. 이후 하인들이 이것을 모두 쓸어 담아 새것으로 교체했다. 그 약초는 천연 공기청정제 역할도 해서 성 안의 악취를 조금은 견딜만하게 만들어주었다.

 

당신이 만약 이렇게 중세 성에 살았다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어떤 것이었을까?

출처 : <Bright Side Korea>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 1위는 ‘김’씨입니다. 압도적으로 천만 명이 넘고 당연히 여러 분파가 있지요.

많은 순서대로 Top 5 통계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① 김(金) 1070만 21.5%

② 이(李)  730만 14.7%

③ 박(朴)  420만  8.4%

④ 최(崔)  233만  4.7%

⑤ 정(鄭)  215만  4.3%


위의 Top 5만으로 2,670만 명인데 한국 인구의 절반이 넘습니다.

6위~10위는 강씨, 조씨, 윤씨, 장씨, 임씨까지 더하면, 10대 성씨만으로 전체 인구의 65% 정도 된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성종 때 (15세기 후반, 연산군의 아버지) 문서 기록을 보면, 사람들의 이름이 말동, 합이, 자질금 등으로 대부분 성이 없었답니다.


불과 100여년 전인 1900년대 초에 조선을 방문했던 미국인 선교사 엘리제 셰핑 (서서평, 1880~1934)이 조선을 순회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답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500여명 중 이름이 있던 사람들은 단 10명뿐이었다. 여인들은 돼지할머니, 큰년, 작은년 등으로 불리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씨를 쓰지 않은 건 반드시 조선시대 얘기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전 고려시대 그리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 때도 성씨가 있는 사람들보다는 없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을 쓰지 않았습니다.


성씨가 늘어나게 된 이유?


16세기 후반까지 조선의 전체 인구 중 성씨를 가진 사람은 약 10%에 불과했답니다. 이 10%도 당시 왕족과 관리들 그리고 족보를 가진 양반들 숫자까지 모두 합한 것이었죠. 한마디로 왕족과 양반을 제외한 중인, 상민, 천민들은 성이란 게 없었다고 보면 정확하겠네요.


조선 전기의 사회적 신분 구성을 대략 보면,

양인 ? 양반 10%, 중인 10%, 상민 30%

천민 ? 노비 50%

로 되어있었고, 관직이 있는 사람들은 성을 붙였지만 그 숫자마저 아주 미미했습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거쳐 선조와 광해군에 이르러 성을 가진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출발점은 바로 ‘공명첩’ 때문이었죠. 공명첩이란 ‘돈을 내고 벼슬을 사는 것’으로, 특히 광해군 때 나라 곳간의 재정 확보를 위해 많이 팔아먹었답니다. 임진왜란으로 당시 나라 재정은 이미 거덜난 상태였다네요.


돈만 내면 천민도 양반이 되고, 비록 명예직이지만 벼슬자리까지 얻던 시기였답니다. 매관매직은 고려시대 때부터 있었지만, 광해군 시절부터 본격화 된 것이랍니다. 상황이 이러니 논밭 팔고 살림 팔아서 명예 벼슬을 얻는 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지요.


나라 전체적으로는 당시 3년마다 호적을 정리했는데, 그때마다 성씨를 가진 인구가 조금씩 늘어난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으니, 점점 양반이 늘어난 것이죠.


그런 후 전 국민이 성씨를 가지게 된 것은, 1909년 일제의 ‘민적법’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이때 양반, 상민 구별 없이 모두 성을 갖게 되었는데, 노비들은 대부분 주인의 성을 따랐습니다. 가끔 한자의 획을 잘못 써서 아주 희귀한 성씨가 나오기도 했지요.


김씨와 이씨를 많이 선택한 이유?


그것은 당시 성을 신고하던 시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조선은 ‘전주 이씨’가 세운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구한말에는 세도가 ‘안동 김씨’의 힘이 대단했죠. 사람들은 이왕 골라잡는 것 남들이 다 알만한 힘있고 유명한 성씨를 선택한 듯합니다.


이런 행태가 너무 낯뜨겁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옛 가야왕의 성씨였던 ‘김해 김씨’나 신라 왕의 성씨였던 ‘밀양 박씨’ 또는 ‘경주 김씨’를 선택했습니다.

오래 전에 사라진 나라로 후손들이 누군지 아무도 알 수 없었고, 비록 없어졌지만 그래도 한때 왕족의 성이니, 나름 뿌리가 있고 폼도 나는 쪽으로 골라잡은 것이겠죠.


한 마을의 노비들이 통째로 전부 같은 성씨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농촌에 보면 유독 집성촌들이 많은데, 예컨대 낙향한 가난한 양반 집이 하나 있으면 성씨가 없던 마을의 부락민들이 돈이나 곡식을 주고 부탁하며 같은 성씨로 입문을 하는 식이었답니다.


어떤 경우에는 마을 사람들이 의견을 모아 마을 전체가 통째로 같은 성씨가 되기도 했고, 지역 유지의 경우 그 가문의 노비와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그 사람의 성을 따르기도 했답니다.


우리나라 족보는 대부분 가짜?


성씨와 함께 엉터리 족보도 함께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왕가의 후손이고 명문가의 자손일 수는 절대로 없을진대…ㅋㅋ 족보가 있다고 한들 실제 족보일 확률도 희박하겠죠. 어쨌든지 10%만 믿으면 되겠네요.


해방 직후까지 가짜 족보를 만들어주고 한 재산씩 모은 브로커들이 많았다네요. 많은 경우 남의 족보를 빌려다가 선대는 그대로 베끼고 아래 대는 현재의 가족과 친척들을 집어 넣어서 위작을 만들었답니다.

족보에 나와있는 조상들 중 6대 이상이 자신의 실제 조상일 가능성도 10%라고 보면 되겠네요.



어찌 보면 족보가 그렇게 망가져버린 것이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군요. 아니었으면 족보 따지면서 귀족입네 양반입네 하는 족속들이 지금도 설쳐대고 생활 속 계급투쟁까지 따라다니면, 그것도 큰 사회문제가 됐을 테니까요.

그냥 모두 함께 고귀해지면서, 다 같이 평등해진 세상이 더 낫겠지요.ㅋㅋㅋ


<꿀잼역사>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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