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인공지능은 착할까? 아니면 악할까?
송은주 작가의 책 <당신은 왜 인간입니까>는 ‘변화하는 세계를 SF문학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SF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으로 그려내는 일종의 사고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두 SF를 통해 인공지능의 미래를 상상하며 함께 살펴보자.
먼저 볼 SF는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아서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A Space Odyssey>이다.

 


우주선 디스커버리호에 5명의 대원이 탔다.
의식을 지닌 인공지능 컴퓨터 할 9000도 동승했다. ‘9000 시리즈는 가장 신뢰도가 높은 컴퓨터입니다.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단조로운 우주여행이 이어지는 도중 인공지능 할이 통신 안테나에 이상이 생겼다고 말한다. 두 대원이 안테나를 확인해봤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자꾸 안테나에 이상이 있다고 말하는 할. 급기야 지구와 통신이 두절되는 사태까지 일어난다.

두 대원은 할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고 의심하면서, 할의 기능을 정지시키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이를 알아챈 할이 반격에 나섰다. 통신을 재개하려고 나간 대원 하나를 캡슐과 충돌시켜 죽인다. 그리고는 동면 중인 세 대원도 죽여버린다.

마지막으로 남은 보먼만이 간신히 할의 기능을 중지시키는데 성공했다. 할은 탐사 성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탑승자를 무차별 살해하는 독보적인 악역 캐릭터다.
할이 만들어 놓은 인공지능에 대한 공포는, 이후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과 매트릭스 등으로 이어졌다.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가 이처럼 비극적일까?
할이 미쳐버린 이유는 모순된 명령 때문이다.
‘오직 할 9000만 우주 탐사의 진짜 목적을 알고 있었다.’

할은 탐사의 진짜 목적을 두 대원에게 숨겨야 하는 입장이었으나, 동료 대원들의 질문에도 대답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모순된 명령을 내린 지구와의 교신을 끊어버리든가, 아니면 진실을 숨겨야 하는 대상인 대원들을 제거하는 것뿐이었다.

 


책 <당신은 왜 인간입니까>는 인공지능이 악의를 갖고 인간을 해치려 하는 것이 오해라고 말한다. 인공지능은 어디까지나 주어진 목표를 이루기 위해 행동할 뿐이라는 것이다.

알고리즘으로 작동하는 인공지능에 우리는 인간의 관점을 투사하고, 그것이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의인화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 정해진 목적을 추구하며, 모순을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런 편견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더 올바르게 인공지능을 설계하고 관계를 설정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아이작 아시모프 Isaac Asimov의 소설 <바이센테니얼 맨 The Bicentennial Man>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에는 너무나 착한 인공지능이 나온다.
마틴의 집에 가사용 로봇이 배달된다. 마틴의 둘째 딸 어맨더는 가사용 로봇에게 앤드루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어느 순간 앤드루는 자신에게 공예품을 만드는 재주와 창조 욕구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틴은 앤드루를 대표로 하는 법인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앤드루가 수익을 낼 수 있도록 해준다. 로봇이지만 재산을 소유할 수 있게 된 앤드루는 자신의 신체를 인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바꾸는데 돈을 투자한다.
몇 년이 지나고 앤드루는 가족을 위해 계속 봉사하겠지만 자유를 달라고 마틴에게 말한다.

결국 앤드루는 역사상 최초의 자유 로봇이 된다. 그 후로도 앤드루는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간다. 인공장기를 개발하는가 하면 자신의 수명을 제한하면서까지 인간과 같은 권리를 얻고자 한다.
작가 아시모프는 앤드루를 인간을 닮고 싶어 하는 인공지능으로 설정함으로써, 사람들이 기계에 대해 갖는 두려움과 공포를 없애려 했다.

그리고는 ‘인공지능에게 의식이 있다면, 인간과 같은 권리를 줘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권리를 인정해주는 하나의 기준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하지만 로봇에게 여러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감정은 신체를 통해 체현되기 때문이다.

절대 부서지지 않는 티타늄으로 만들어진 로봇은 사람과 같은 공포나 고통을 느낄 수 없다. 프로그래밍으로 두려운 척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이런 로봇을 원하는 걸까?
로봇이 불길이 치솟는 화재 현장에서 무서워서 들어가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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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로봇에 감정을 부여한다는 SF의 공상은 매력적이지만, 감당하지 않아도 될 온갖 골칫거리가 따라올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미래의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와 다른 존재들을 마주할 것이다.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 기계를 몸에 이식한 사이보그, 기계에 의식을 업로드한 기계인간까지.
이런 존재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책이 소개하는 여러 SF 이야기를 통해 다른 존재들과 어떻게 공존하면 좋을지 사고실험에 참여해보자.

송은주 저 <당신은 왜 인간입니까 : AI 시대, 우리를 기다리는 섬뜩한 질문> <책그림>을 참고

과감히 덜어내자.

불과 2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거실에 앉아 KBS, KBS2, MBC, SBS를 차례로 돌려보다 볼게 없으면, 잠깐 EBS에 눈길을 주다가 TV를 꺼버리곤 했다.

지금은 수백 개가 넘는 채널이 방대한 양의 콘텐츠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다양한 채널이 주는 기쁨도 잠시, 이젠 너무 많은 선택지 앞에서 오히려 선택장애를 앓게 되었다.


실제로 미국의 한 슈퍼마켓에서 한 쪽에는 6종류의 잼을, 다른 쪽에는 24종류의 잼을 놓고 어느 쪽이 많이 구입하는지 관찰했다. 예상대로 손님들은 24종류의 잼이 놓인 곳을 더 많이 방문했다. 그러나 구입 실적은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6종류가 놓인 곳의 방문자 중 30%가 잼을 구매했지만, 24종류 쪽에서는 그 비율이 3%로 떨어졌다.

이처럼 사람들은 선택 사항이 너무 많으면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또 완벽한 선택을 하려고 결정을 미룬다.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사회전반에 걸쳐 거의 모든 분야에서 ‘과잉’ 현상이 문제되기 시작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정보 과잉’이다.

요즘 가장 핫한 유튜브에 업로드 되는 동영상 분량은 하루에만 66년치 이상이 된다고 한다. 여기에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각종 SNS는 그런 과잉을 부추기고 있다.


사람들의 주의 집중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무엇이 올바른 정보인지 분간조차 어려워졌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더 많은 정보를 갖기보다, 제대로 된 정보를 선택하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큐레이션>의 저자 마이클 바스카 Michael Bhaskar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정보의 선별 과정을 거쳐 대상을 축소하고, 과감히 덜어내야 한다! 지금은 생산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생산한 것을 어떻게 선별하고 배치할 것이냐가 더 중요해졌다.’


‘큐레이션’은 원래 미술관에서 전시 기획하던 일에만 사용되다가, 최근 들어 영화, 책, 스타일 등 다양한 영역에서 양질의 정보를 추출해서 가치를 재창출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사람들은 똑 같은 대상을 어떻게 배치하고 구조화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우리의 뇌는 사물을 주변과 비교해서 인식하기 때문에, 똑같은 것도 주변 환경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인다. 관련 정보를 어떻게 큐레이션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구글이 운영하는 유튜브는 큐레이션의 대표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유튜브는 방대한 양의 정제과정을 통해 소비자가 원하는 맞춤 정보를 제공한다. 좋아할만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연결하고, 현명한 선별 과정을 통해 소비자가 싫어할만한 정보는 계속 배제한다. 때문에 우리는 유튜브를 최고의 큐레이션 도구로 평가하곤 한다.


그렇지만 큐레이션의 한계도 분명 존재한다. 바로 ‘필터버블 Filter Bubble’이다. 필터버블은 미국 시민단체 ‘무브온 Move On’의 이사장인 엘리 프레이저가 제시한 개념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생각 조종자들>에서 이용자가 관심 없는 정보나 싫어하는 정보는 저절로 걸러지고, 좋아할만한 정보만 계속 제공되는 현상이 반복되면서, 특정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정보만 받게 된다고 말한다.

결국 자신의 견해와 비슷한 정보는 자주 접하게 되고, 반대로 상반되는 정보는 점차 멀어져 왜곡이 심화된다는 것이다.


더 큰 채움을 위해서는 비워야 한다.

세계적 마케팅 전략가인 알 리스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는 ‘확장’이다.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집중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많을수록 적어지고, 적을수록 많아진다.”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는 것은 간단한 일 같지만, 거기에는 큰 노력이 뒤따른다.

서로 무관해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연결고리를 찾아내고 익숙한 것을 새롭게 배열하면, 불현듯 아이디어가 싹트고 엄청난 기회가 생기게 된다.

큐레이션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마이클 바스카의 <큐레이션> <북올림> 참고




증강현실 增强現實

augmented reality :

사용자가 눈으로 보는 현실세계에 가상 물체를 겹쳐 보여주는 기술. 현실세계에 실시간 부가정보를 갖는 가상세계를 합쳐 하나의 영상으로 보여주며, 혼합현실(Mixed Reality, MR)로도 불린다.


육체적 노동부터 머리를 쓰는 일, 감정도 필요하다. 여기서는 일마저도 알고리즘으로 무장한 AI로봇이 인간을 대체하려 한다. 20년 후엔 절반 가까이, 30~40년 후엔 거의 모든 직업이 대체될 것이라고 하는데, 좋든 싫든 결론은, '인간은 일을 않게 된다'는 말이다.


일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정말 우리가 꿈꾸던 파라다이스일까?

유발 하라리 (Yuval Noah Harari, 예루살렘 Hebrew대학교 교수)는 그의 저서 <호모 데우스 Homo Deus, A Brief History of Tomorrow>에서 앞으로 인류를 위한 질문은,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원하기를 원하는가?'라고 말한다.



석기시대부터 현재까지 인류는 쉬지 않고 일해왔다. 일을 해야만 생존할 수 있었고, 하루 대부분을 일을 하며 보냈기에 사람들의 삶은 일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로봇이 인간의 일을 해주고 인간은 일을 하지 않게 된다면, 사람들은 뭘 하며 살까?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을까? 유발 하라리는 그에 대한 답을 증강현실 게임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증강현실이란 포켓몬GO와 같이 실제 환경과 가상의 사물을 조합해서 완전 실제도 아니고 완전 가상도 아닌 증강현실 세상을 말한다.


고통이 없으면 행복도 없고, 어려움이 없으면 성취감도 없다. 꿈이 너무 완벽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볼을 꼬집기 마련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파라다이스보다는, 고통과 어려움이 존재하는 증강현실에서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우리가 미래에 가상의 게임이나 하고 살 것이라는 게 와닿지 않는가?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 인류는 지금까지 계속 증강현실 속에 살아왔다. 그 게임의 이름은 바로 '종교'다.


전 세계 수십억 명이 플레이 해온 이 거대 게임에는 여러 가지 룰이 있다.

돼지고기 먹지 않기, 소고기 먹지 않기, 일요일에 기도하러 가기, 히잡 쓰기, 계급 나누기, 우상 숭배하지 않기 등 셀 수도 없는 게임 룰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이 규칙들을 하나하나 지키며 계속 포인트를 쌓고, 천국이라는 게임의 목표를 향해 인생을 플레이한다. 게임에 지면 지옥이라는 엄청난 벌칙이 있으니 열심히 플레이해야 한다. 현실이 아닌 가상으로만 존재하는 규칙이지만, 사람들은 이 증강현실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얻는다.



주위에 포켓몬GO에 빠진 친구들을 보았는가? 맨눈으로 본 거리에는 나무와 아스팔트 바닥만 보이지만, 스마트폰을 든 그들 눈에는 귀여운 포켓몬들이 보인다. 맨눈으로 바라본 예루살렘 성전에는 칙칙한 벽돌 빌딩만 보이지만, 성경이라는 스마트북을 든 사람들의 눈에는 신성한 천사들이 보인다.


삶의 의미는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머릿속에 가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정통파 유대인들은 실제로 평생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부에서 보조금을 주거나 부인이 대신 일을 해주기 때문에, 그들은 일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들이 하루 종일 뭘 하는지 아는가? 그들은 매일 종교 의식을 행하고 '스마트북'을 들여다본다.


자녀가 있다면 직접 실험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제부터 공부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좋아하는 과자, 치킨, 피자를 방에 갖다 줘보라. 그들은 분명 컴퓨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며칠을 방 안에서 게임만 할 것이다.


그래도 와닿지 않고, 현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대가 생각하는 현실이란 무엇인가?

▷종이에 적혀있는 법 지키기?

▷하늘색 기체층 바라보며 기도하기?

▷콘크리트 빌딩에서 초록색이나 황색 종이 모으기?


처음부터 우리에게 현실이란 게 존재했을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가상의 규칙에서 가상의 목표를 위해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생각해보자.

'우리는 무엇을 원하기를 원하는가?'


유발 하라리 저 <호모 데우스>와 <1분 과학>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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