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대 시간강사가 그만두고 대리기사를 시작했다. 카카오드라이버를 깔고 밤마다 길거리에 나간다. 가족 생계가 달린 대리기사 일은 생각보다 고되다.
무엇보다도 누군가의 대리가 되면서 그는 3가지 자유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먼저 몸의 자유가 사라진다.
함부로 차 안 의자 위치를 바꿀 수 없다. 백미러가 잘 안 보여도 그대로 두어야 한다. 차 주인이 자기 몸에 맞춰 놓은 것들이니까…

말의 자유가 사라진다.
손님에게 먼저 말을 거는 대리기사는 거의 없다. 대화를 하더라도 주로 ‘네, 맞습니다’의 대답만 하게 된다. 손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한다.

끝으로 생각이 없어진다.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대신, 영혼 없이 운전만 하게 된다.

그 남자는 생각한다.
‘타인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 게 사회의 축소판과 같은 거구나. 대리기사가 아니어도 사회 곳곳에는 3가지 자유를 뺏긴 채 일하고 행동하는 존재들이 참 많구나.’

김민섭 작가의 <대리사회>를 보면, ‘을’로 살아가며 주체성을 잃어버리는 노동자, 학생 그리고 우리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대학교에도 대리기사들이 있다. 학생들이다.
우리나라 학생들 보고 질문하지 않는 아이들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건 학생들 문제이기보다는 교수의 문제에 더 가깝다.
저자는 학부생이나 대학원생들이 가장 먼저 신경 쓰는 것은, 해당 교수가 가지고 있는 입장이라고 말한다.

학점을 받거나 지도를 받아야 하는 ‘을’로서, 교수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 되니까… 토론이 가능하려면 교수가 자신의 입장을 숨기거나, 자신의 의견에 반대해도 불이익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꽤 많은 교수가 얼굴을 붉히며 면박과 불이익을 준다고 한다.

교수가 강의실의 유일한 주체가 되어 말을 쏟아내는 순간, 그 안의 학생들은 타인의 운전석에 앉은 대리기사가 되어버린다.
스스로 사유하기를 멈추고,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주제가 나와도 침묵하는 것이다.

저자는 회사에도 대리기사가 많다고 말한다.
부장이나 팀장은 언제나 자유롭게 회의 안건을 내고 소통하자고 말하지만, 수용 가능한 범위가 제한되어 있음은 눈치껏 알아야 한다.

부하 직원은 직장 상사에게 아이디어를 내지 않고, 학생은 교수의 의도에서 벗어난 답을 제출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을’의 공간에서 순응하는 방법을 배워왔다. 그렇게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직의 문화와 규칙이 나쁜 건 아니다. 어느 정도는 규칙이 있어야 조직이 굴러갈 테니까. 문제는 그 규칙과 문화가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으로 변할 때다.
‘원래 우리는 이래. 옛날부터 이렇게 해왔어. 왜 너만 불만이야?’라는 말로, 질서와 효율을 위해 존재했던 규칙들이 조직 보호와 착취의 목적으로 사용된다.

 


책은 ‘대리사회의 괴물은 통제에 익숙해진 대리인간을 원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틀을 만들고 스스로 사유해야 한다. 끊임없이 불편해하고 의심하고 질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요된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 믿으며, 타인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가장 무서운 것은, ‘불합리하고 규칙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자신은 옳은 것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은 조직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혹은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꽤나 좌절스럽다.


저자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책의 글을 쓰면서, 대학교의 비합리적인 시스템과 조교나 시간강사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고발했는데, 이때 자신을 가장 좌절시켰던 것은 대학이라는 ‘갑’이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을’이었다고 고백한다.

조금은 자신을 지지해줄 것이라 믿었던 동료들이,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 우리가 받을 피해는 생각해봤냐? 너만 그렇게 힘드냐? 우리도 다 겪었던 일이다.’라는 반응을 보였을 때 저자는 무너졌다고 말한다.
‘을’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갑’의 충실한 ‘을’들이다. 순응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게 된 ‘을’들이다.

‘을’은 어떻게 주체성을 얻을 수 있을까?
책은 사람의 배려와 정에 호소한다. 대리기사를 하면서 저자는 타인을 주체로서 일으켜 세우는 이들을 만났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선생님의 차라고 생각하고 운전해주십시오.’라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기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의견을 물어봐 주었다고 한다.

오늘만 한정특가!


서로가 각각의 위치에서 그 사람의 주체성을 인정해주자.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주체성을 끌어올려주자. 상대방을 서비스의 수단이 아닌, 사람으로 바라보고 정을 주고받자.

‘을’끼리 공감해주자. ‘을’끼리 싸우지 말자. 그리고 부당한 일을 겪으면 힘을 보태주자.
아마 이런 것이 저자가 직접 대리기사를 뛰면서 얻어낸 이 사회의 희망일 것이다.

김민섭 저 <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책그림>을 참고

사형 선고를 받은 한 남자가 있었다.

이릉(李陵)이라는 죄 없는 젊은 장수를 변호하다가, 황제의 미움을 산 게 원인이었다. 이릉은 漢나라의 뛰어난 무장으로 보병 5천 명을 거느리고 그 열 배가 넘는 흉노군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화살과 무기는 모두 바닥 났고 흉노군에 투항하고 만다. 이 일로 漢武帝는 매우 진노했다.


황제의 눈치를 살피던 대부분의 신하들은 하나같이 이릉의 일에 침묵했다. 그 와중에 오직 한 사람만이 이릉을 변호하고 나섰다.


‘이릉은 충신입니다. 그의 충절은 이미 수많은 전투에서 증명되었고, 집안 대대로 漢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명문가입니다. 어찌 그가 오랑캐 흉노에게 항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릉은 어쩔 수 없이 거짓 항복을 한 것입니다.’




이릉을 변호하던 그 남자는 결국 옥에 갇히게 되었고, 사형선고까지 받게 된다.

당시의 법으로 사형을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50만전의 막대한 돈을 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궁형을 받아 내시가 되는 방법이었다.


그는 하급관리로 많은 돈이 있을 리 만무했고, 생식기를 제거 당하는 궁형은 사대부에게 죽음보다 무서운 치욕의 형벌이었다. 그는 선택의 기로에서 최고의 능욕인 궁형을 자청한다.

죽음보다 더 수치스러운 궁형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과업인 ‘사기 史記’를 완성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사마천’이다.

그는 기원전 145년 중국 섬서성 용문에서 태어났다. 황제 측근으로 각종 기록을 담당하던 아버지 사마담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정진했다.


10살 때부터 경전을 암송하고, 17살 즈음 당대 최고의 대유학자 동중서의 문하생이 되어 ‘춘추’등의 역사철학을 배운다.

20대에는 아버지 권유로 역사 유적지를 찾아 중국 천하를 방랑하는데, 이는 훗날 <사기> 저술의 큰 밑거름이 된다.


38살 때인 기원전 108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만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관으로서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사관 집안으로 자부심이 강했던 아버지 사마담이 죽기 전 남긴 유언, ‘역사서의 완성’을 평생 자신의 사명으로 물려받은 것이다.


40대에 접어든 사마천은 조정의 일과 <사기> 저술이라는 두 가지 일을 해내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기구한 운명이 시작되었다. 그의 나이 47살이 되던 해에 일생일대의 큰 사건, 바로 이릉 변호 건으로 황제에게 바른 말을 하다가 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상황은 갈수록 꼬여만 가더니, 결국 이릉이 흉노에게 벼슬까지 받고 병법을 가르쳤다는 근거 없는 소문마저 돌았다. 이성을 잃은 한무제는 이릉의 가족을 몰살시킨 다음, 역적을 옹호한 죄로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마천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대로 억울하게 죽기보다 치욕스럽지만 궁형을 자청한 것이다. 그는 이 시기 꼭 올바른 사람이 승리하는 것도 대접받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그리고 지난날 일어났던 역사적인 일들을 되돌아봄으로써, 붓으로 세상의 부조리와 인간적 가치를 되살려 후세에 전하려 했다.


궁형을 당한 이후 <사기>의 저술 방향은 크게 바뀐다.

漢나라와 황제를 칭송하던 그가 황제에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고, 권력층의 문제를 신랄하게 지적하며 세태를 풍자했다. 또한 사회적 약자, 민중의 삶을 역사의 전면에 끄집어냈다.


2100년 전 당시 민중을 역사의 전면에 끌어냈다는 점은 파격적인 발상으로, 이는 사마천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현실의 부정부패를 과감히 비판하고 정의와 의리를 칭송하는 내용은, 사마천 이후의 역사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는 <사기>를 읽으며 인생의 의미와 처세의 태도, 그리고 인간관계 등에 대해 깊이 사색할 수 있다.

<史記>는 130권, 총 52만 6천 500자로 그 양이 방대하다.

전설 속 중국의 시조인 황제부터 요.순 임금, 하-은-주 왕조, 춘추전국시대, 진시황의 천하통일, 7년에 걸친 楚漢쟁패, 유방이 세운 한나라까지 3000년의 역사를 기록했다.


사마천은 <사기>를 통해 성공과 실패의 법칙, 부와 권력의 비밀, 인간과 사회에 관한 모든 것을 밝혀내려 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말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사기>에는 황제나 고관대작, 영웅과 권세가뿐 아니라 상인과 농사꾼, 심지어 자객과 도굴꾼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종류의 인간 군상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펼치는 생생한 언행은 마치 우리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리고, 언제든지 자신의 처지에 대입하여 삶의 지혜를 얻어낼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특히 사마천 본인이 절실하게 경험했듯,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좌절과 시련을 어떻게 돌파하고 위대한 삶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지 풍부한 사례와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3천년 역사에서 찾은 지혜의 보고 <사기 인문학>을 한 번 읽어보면 어떨까?


한정주 저 <사기 인문학> <북올림>을 참고




사람들은 기묘한 사실이나 이해할 수 없는 이슈들에 대한 답을 찾는데 애를 쓴다. 그런 경우 머지않은 시간 내에 관련된 것들의 과학적 설명이 발견된다. 하지만 이슈의 그늘 속에서 벌어지는 누군가의 악의적인 의도로 인해, 단순한 설명으로는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이런 과정에서 음모론이 탄생하게 된다.


음모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단지 괴짜들일까 아니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한 무언가를 정말 알고 있는 사람들일까?


지구 내부는 텅 비어 있고 그 공간에 미지의 세상이 펼쳐져 있다는 생각은, 오랜 세월 동안 신화와 문학에 이용되어 왔다.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들도 종종 여기에 빠져들곤 했다.




에드먼드 헨리는 자신의 이름이 붙은 혜성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구 내부에는 여러 개의 공간이 존재하고 아마 그곳에서 거주도 가능할 것이다’라고 최초로 제시한 인물이다.

이후 지구의 양극에는 구멍이 뚫려있어서 이곳을 통해 지구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는 설이 등장했다.


오로라도 대기와 지구 내부 공간으로부터의 빛이 뒤섞여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미국의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은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기 위해 극지방 조사 탐험대에 투자금을 지원할 정도였다. 이 수수께끼의 입구를 아무도 다시 찾지 못한 것 등, 지구공동설의 모순되는 사실이 많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이 가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아돌프 히틀러나 나치 간부들이 전쟁 후 살아남아 지하세계로 도망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현대의 지구공동설 지지자들은 인류는 깊이 12Km 이상의 구멍을 판 적이 없고, 이 때문에 더 깊은 곳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을 근거로 삼고 있다.

그렇지만 지구 물리, 측지학, 천문학, 화학 등의 독립적 과학 데이터는 이런 설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HIV와 에이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설도 있다.

인간의 면역결핍 바이러스가 발견된 이래, 몇 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 바이러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과학자들은 HIV는 에이즈를 발병시키는 것, 그리고 에이즈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런 2가지 전제 모두에 의심을 품는 사람이 많다.


에이즈를 부정하는 이론은 여러 가지가 있다. HIV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면역계는 충분히 HIV와 싸울 수 있기 때문에 에이즈는 뭔가 다른 것이 원인으로 발병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에이즈를 발병시키는 것은 의사가 HIV 감염자에게 처방하는 항 매트로 바이러스 제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부정파의 사람들 모두 HIV는 어떤 집단의 목적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공적으로 등록된 HIV의 진단은 모두 세계보건기구의 데이터베이스에 기재되어 실제 감염 건수를 알기 위해서는, 보고되는 감염 건수의 개수를 더해 산출하는데 그 개수가 점점 올라가고 있다.


이를 테면 1996년 아프리카에서 보고된 감염 건수는 12배로 증가했는데, 몇 년 후 이 개수는 38배가 되어 있었다. 이 정도 기세라면 아프리카의 HIV 감염자 수가 과거 수 년간에 비해 400만 명이나 증가한 것도 이상하지 않은 셈이다.


2010년 HIV 감염자수는 세계적으로 3,400만 명이었다. 그러나 이 데이터에 누적된 수치가 있다는 것, 즉 1980년대 초반의 정보가 포함된 것을 세계보건기구는 침묵하고 있다.

새로운 글로벌 감염증이자 죽음마저 초래하는 위험한 이 감염증은 현실의 문제로부터 주의를 끌기 위한 수단이며, 국가 재원으로부터 자금을 얻기 위한 계략일지도 모른다.


에이즈 치료기관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이론을 이용해 사람들을 조종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가설이고 추측일 뿐이다.


‘블루빔 프로젝트’라고 들어보았는가?

의식을 컨트롤하는 기술은 끊임없이 계속 진보하고 있다. 블루빔 프로젝트는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거짓임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대규모 압도적인 위력의 가상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연구자들의 보고로는 이 프로젝트에서는 강한 레이저 광선과 지구상의 모든 장소에 영상을 비추는 위성 수상기가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영상의 내용은 인류를 공포에 빠뜨릴지도 모른다.

음모론자들은 이를 외계에서 온 침략자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가진 리얼리티 쇼의 임팩트는 음성이나 소리가 붙여지면 한층 더 강해질 것이다.


이와 같은 사건은 통일된 정보 하에 세계가 결속하기 위한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

홀로그램으로 비추는 시나리오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두 번째 출현으로, 그 결과 가짜 구세주가 나타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1990년대 이미 외계인이라는 테마를 사용해서 모방을 진행하는 책을 낸 그리스도교 작가가 있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들은 행성 규모의 사기 사건이 일어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출처 : <그래나도> <To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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