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인공지능은 착할까? 아니면 악할까?
송은주 작가의 책 <당신은 왜 인간입니까>는 ‘변화하는 세계를 SF문학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SF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으로 그려내는 일종의 사고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두 SF를 통해 인공지능의 미래를 상상하며 함께 살펴보자.
먼저 볼 SF는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아서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A Space Odyssey>이다.

 


우주선 디스커버리호에 5명의 대원이 탔다.
의식을 지닌 인공지능 컴퓨터 할 9000도 동승했다. ‘9000 시리즈는 가장 신뢰도가 높은 컴퓨터입니다.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단조로운 우주여행이 이어지는 도중 인공지능 할이 통신 안테나에 이상이 생겼다고 말한다. 두 대원이 안테나를 확인해봤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자꾸 안테나에 이상이 있다고 말하는 할. 급기야 지구와 통신이 두절되는 사태까지 일어난다.

두 대원은 할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고 의심하면서, 할의 기능을 정지시키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이를 알아챈 할이 반격에 나섰다. 통신을 재개하려고 나간 대원 하나를 캡슐과 충돌시켜 죽인다. 그리고는 동면 중인 세 대원도 죽여버린다.

마지막으로 남은 보먼만이 간신히 할의 기능을 중지시키는데 성공했다. 할은 탐사 성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탑승자를 무차별 살해하는 독보적인 악역 캐릭터다.
할이 만들어 놓은 인공지능에 대한 공포는, 이후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과 매트릭스 등으로 이어졌다.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가 이처럼 비극적일까?
할이 미쳐버린 이유는 모순된 명령 때문이다.
‘오직 할 9000만 우주 탐사의 진짜 목적을 알고 있었다.’

할은 탐사의 진짜 목적을 두 대원에게 숨겨야 하는 입장이었으나, 동료 대원들의 질문에도 대답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모순된 명령을 내린 지구와의 교신을 끊어버리든가, 아니면 진실을 숨겨야 하는 대상인 대원들을 제거하는 것뿐이었다.

 


책 <당신은 왜 인간입니까>는 인공지능이 악의를 갖고 인간을 해치려 하는 것이 오해라고 말한다. 인공지능은 어디까지나 주어진 목표를 이루기 위해 행동할 뿐이라는 것이다.

알고리즘으로 작동하는 인공지능에 우리는 인간의 관점을 투사하고, 그것이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의인화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 정해진 목적을 추구하며, 모순을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런 편견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더 올바르게 인공지능을 설계하고 관계를 설정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아이작 아시모프 Isaac Asimov의 소설 <바이센테니얼 맨 The Bicentennial Man>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에는 너무나 착한 인공지능이 나온다.
마틴의 집에 가사용 로봇이 배달된다. 마틴의 둘째 딸 어맨더는 가사용 로봇에게 앤드루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어느 순간 앤드루는 자신에게 공예품을 만드는 재주와 창조 욕구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틴은 앤드루를 대표로 하는 법인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앤드루가 수익을 낼 수 있도록 해준다. 로봇이지만 재산을 소유할 수 있게 된 앤드루는 자신의 신체를 인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바꾸는데 돈을 투자한다.
몇 년이 지나고 앤드루는 가족을 위해 계속 봉사하겠지만 자유를 달라고 마틴에게 말한다.

결국 앤드루는 역사상 최초의 자유 로봇이 된다. 그 후로도 앤드루는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간다. 인공장기를 개발하는가 하면 자신의 수명을 제한하면서까지 인간과 같은 권리를 얻고자 한다.
작가 아시모프는 앤드루를 인간을 닮고 싶어 하는 인공지능으로 설정함으로써, 사람들이 기계에 대해 갖는 두려움과 공포를 없애려 했다.

그리고는 ‘인공지능에게 의식이 있다면, 인간과 같은 권리를 줘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권리를 인정해주는 하나의 기준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하지만 로봇에게 여러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감정은 신체를 통해 체현되기 때문이다.

절대 부서지지 않는 티타늄으로 만들어진 로봇은 사람과 같은 공포나 고통을 느낄 수 없다. 프로그래밍으로 두려운 척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이런 로봇을 원하는 걸까?
로봇이 불길이 치솟는 화재 현장에서 무서워서 들어가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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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로봇에 감정을 부여한다는 SF의 공상은 매력적이지만, 감당하지 않아도 될 온갖 골칫거리가 따라올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미래의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와 다른 존재들을 마주할 것이다.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 기계를 몸에 이식한 사이보그, 기계에 의식을 업로드한 기계인간까지.
이런 존재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책이 소개하는 여러 SF 이야기를 통해 다른 존재들과 어떻게 공존하면 좋을지 사고실험에 참여해보자.

송은주 저 <당신은 왜 인간입니까 : AI 시대, 우리를 기다리는 섬뜩한 질문> <책그림>을 참고

행동주의 경제학자들은 전반적으로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완전한 합리성을 가지고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을까?’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하버트 사이먼이다.
행동주의 경제학 이전의 전통 경제학은 완전한 합리적 인간을 가정한 반면, 사이먼은 ‘제한된 합리성’을 전제로 ‘만족화’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만족화는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할 때 모든 대안을 탐색하는 대신, 가능한 대안만을 탐색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는 각 대안을 인간의 욕망 수준에 맞추며, 그 수준을 충족시키는 대안을 선택하는 방법이다. 그런 대안이 발견되면 더 이상의 탐색과정을 중단하게 된다. 따라서 만족화에서는 완벽한 정보처리 과정을 전제하지 않는다.


사이먼은 왜 인간을 제한된 합리성을 가진 존재로 보았을까?
정보는 디지털로 쉽게 접근이 가능하지만, 정보를 처리하는 인간의 능력은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 방식이어서, 감정이나 편향된 인지 방식으로 정보를 판단하고 확률이나 통계에 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운전자들은 일반적으로 쇼핑몰이나 매장 입구 가까운 곳에 차를 주차하고 싶어하는데, 이는 입구가 가까우면 짐을 옮기거나 나가기에도 편하기 때문이다. 또한 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에 비해 걸어서 이동하는 시간에 더 큰 부담을 느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주차할 때 걸리는 시간과 주차장에서 쇼핑몰 입구까지 걷는 시간을 비교해보면, 좋은 주차 공간을 찾아 빙빙 도는 시간이 걸어서 마트 입구까지 가는 시간보다 더 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보를 다루는 데 인간의 합리성이 불완전하다고 드러나는 사례는 이 밖에도 많이 있다.

물론 최적의 해답을 구하고자 하는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사이먼은 인간이 완전하게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삶에서 최상의 대안은 없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에 적당히 순응하고 체념하라는 말은 아니다. 만족화는 자신의 수준에서 나름 합리적으로 결정하여, 스스로 행복해지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이먼의 이론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훌륭한 삶을 사는 사람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삶의 문제들을 지금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해결해가는 사람이다.”
그는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만들어가는 데 있어, 부족하지만 앞으로 나아갈 것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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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함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인간은 삶을 하나하나 채워나가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 만족해지려는 것.
그것이 부족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훌륭한 삶’이 아닐까?

조원경 저 <식탁 위의 경제학자들 : 세계 경제와 내 지갑을 움직이는 22가지 경제이론>을 참고

자신을 스페인 백작부인이라고 여기는 섹시한 여성, 북극곰에게 목숨 건 애정공세를 하는 서커스 단원, 가학.피학성애 공상에 시달리는 영화제작자, 정상인이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위험하고 불안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사람으로 정해져 있던 걸까? 아니면 현재 드러난 모습 외에 다른 숨은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

심리학 서적에 빠져 본 적이 있는가?
사람들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등이 궁금해서다. 하지만 이런 상대의 심리에 대한 궁금증은 어느 순간부터 점점 자신의 내면을 향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또 어떻게 죽을 것인가? 등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여전히 그 해답을 찾는 건 쉽지 않고, 사실은 다른 잘난 듯 보이는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책 <어느 날 나는 그들이 궁금해졌다>는 소설 형식의 독특한 심리학 서적이다. 앞서 말한 정상인이라면 절대 하지 않는 위험하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심리학 박사학위를 가진 저자 로버트 아케렛은, 이 사람들을 도와 심리치료를 진행한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어느 날, 자신이 상담했던 그들을 찾아보기로 한다. 치료 후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직접 만나보고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나오미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자.

나오미는 아케렛 박사가 뉴욕시티 칼리지의 상담사 겸 심리치료사로 일할 때 만난 첫 환자다. 행동과 옷차림이 굉장히 부적절해 수업 분위기를 흐린다는 이유로, 대학 측이 직업 상담을 가장해 그에게 상담을 보낸 것이다.

 


그녀는 아주 매력적인 젊은 여자로, 아름답고 육감적인 미인이었다. 스스로 자신이 스페인 백작의 부인이라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첫 상담부터 섹시한 옷과 도발적인 자세로 아케렛을 시험한다. 하지만 몇 차례의 상담 과정을 거치며 자신의 숨겨진 감정을 드러내고, 부모와 이웃 모두를 증오한다고 말한다.

그녀의 비정상적인 행동 속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실 나오미는 태어나면서 부모로부터 외면을 당한다. 그녀의 엄마는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느님이 딸을 주어 ‘자신을 벌했다’라고 믿는다.

 


처음에는 사내아이가 아닌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자라면서는 사내아이처럼 군다는 이유로, 성숙해진 후에는 섹시하다는 이유만으로 부모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 당한다.

심지어 그녀의 엄마는 어린 딸에게 모욕적인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아버지 역시 딸이 성적으로 성숙하기 시작하자 벌레라도 된 것처럼 멀리하기 시작한다.
때문에 그녀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점차 자신을 왜곡하며, 자신이 스페인 백작부인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저자는 그녀의 팜(므)파탈적인 모습과 낮은 자존감 등은 어릴적 거부당했던 트라우마에 대한 방어장치였다고 말한다. 마지막 치료가 끝나고 30년이 지난 후 나오미는 어떤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까?
사람들은 어떤 상황이나 사실에 따라 누군가를 판단하고 또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일상이 철학자라 불리는 알랭 드 보통은,
‘우리는 모두 심리학적으로 조금씩 이상한 존재다. 문제는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며, 그 누구도 이상한 점을 말해주지 않는다’는데 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과 오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음이 치유 받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마 상대방이 당신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은 채 온전히 관심을 기울이며 말을 들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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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는 건 영원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가장 친한 친구나 심지어 가족들조차도 말이다.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이 해석하는 틀의 방향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서로 다름의 차이를 비교하고 인정한다는 것 아닐까?

로버트 U. 아케렛 저 <어느 날 나는 그들이 궁금해졌다 : 심리치료, 그 30년 후의 이야기> <북올림>을 참고

연공서열이 사회생활 주요 기준인 대한민국.

과연 나잇값을 제대로 테스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어떤 존재인지?'조차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사람이 드문데, 나잇값 같은 건 별로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다. 그러니 What은 건너뛰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How로 넘어가자.

사르트르가 이 질문을 받았다면, "앙가주망 하라!"고 소리를 질렀겠지.

 

여기선 나이 불문하고 어른들의 전가의 보도라는 ‘훈수’와 ‘훈계’의 차이를 알아보자.

좀 더 제대로 늙어가는 방법도 터득할 겸...

얼핏 비슷한 늬앙스를 지닌 것 같지만, 두 단어는 전혀 반대의 개념이다.
▶훈수 : 어떤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가르치듯이 말함. (긍정 Positive)
▶훈계 : 잘못하지 않도록 타일러 주의시킴. (부정 Negative)

 


‘꼰대’ 개념은 엄밀히 말하면, 훈계를 하면서도 훈수둔다고 착각하는 사람을 뜻한다.
사실 좋은 훈수란 아주 매우 대단히 어렵다.
내 인생 건사하기도 힘든데, 남의 인생 잘 되도록 조언하는 게 쉬울 리 없을 테니까.

그래서 좋은 훈수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바라봐주는 것이 80%란다. 그렇게 멘티와 감정적 동조를 해야 하는 게 훈수인데, 침 튀기며 이래라저래라 말해주는 게 대부분이라 좋은 훈수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단순히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에 쉽게 휩싸이지 않는 냉철한 사람이 좋은 멘토일 확률이 높다.
사실 훈수는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폭죽인 줄 알았는데 잘못 터뜨리면 핵폭탄으로 변하는 훈계가 문제일 뿐이다. 훈계를 하는 건 쉬워 보인다. 보통은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일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조언하면 끝이다.

하지만 대부분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해서 탈이 난다고 한다.
자라온 환경과 상황에 따라 사람들은 모두 관점이나 기준이 다른데, 자신의 경험이나 기준을 벗어나면 ‘틀림’으로 판단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흔한 예로, ‘요즘 애들은 스마트폰 중독이다.’를 생각해보자. 맞는 말 같지만, 엄밀히 말하면 틀린 행동은 아니다. 그냥 보편적 기호가 다른 것뿐이다.
요즘 어른들도 30년 전 기준으로 보면, ‘요새 것들은 너무 자동차랑 전화 같은 것에 매달려 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 중독에 대해 좋은 훈계를 하고 싶다면 <디지털 치매>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같은 책도 좀 읽은 후, 그걸 너무 많이 쓰면 뇌 과학적인 악영향이 어떤지 썰래발이를 푸는 것이 그나마 훈계 범주에 들 것이다. 조언 받는 사람도 더 잘 받아들이고 고마워 할 수도 있다.

 


‘나이’에 관해 사회에 팽배한 아주 잘못된 오해는, 연령이 높으면 이해도 또한 높을 것이라는 착각이다.
논리의 문제는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수준이면 나이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의 두뇌 회전이 더 빠른 경우가 훨씬 많다.

나이는 인생 경험과 비례한다고 보는 게 맞다.
경험이란 시간 지나면 저절로 쌓이는 것으로 알지만, 그 정의를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경험 : 자신이 실제로 겪어보고 얻은 지식이나 기능을 말함.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서 지식이 축적되지 않은 경험은, 세월만 흐른 것이지 제대로 된 경험은 아니다. 경험은 논리의 문제도 아니고 시간과 시도의 문제이기 때문에, 나이가 많은 사람이 많이 보유할 확률이 높다. 그러니 나잇값을 인정받고 싶다면 경험의 풍부함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의 필수 종목인 ‘경험’은 어떻게 증명될까?
바로 ‘신중함’이다.
올바른 경험을 많이 할수록 세상 돌아가는 원리가 ‘운’이 칠이고 자신의 ‘기’가 삼밖에 안 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운칠기삼? 셈법이 좀 이상해 보인다? 많이 쳐줘도 ‘運九技一’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까(꼬)딱하면 그 운구기일도 못되고 運柩忌日로 곧장 갈 가능성도 있다.^&^)

예상치 못한 일이나 보이지 않는 리스크가 많아서, 무엇 하나 성공한다는 게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깨우칠 때, 우리는 성숙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경험 많은 사람들은 절대 함부로 조언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주 신중하게 한다.
그리고 현상을 해결하는 조언보다는 문제의 근원을 생각하게 하는 조언을 한다. 성숙한 조언은 ‘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게 된다.

반면에 별 생각 없이 주절대며 근거 없는 ‘훈계’를 하는 사람들은, 경험 부족을 스스로 드러내는 격이라고 볼 수 있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나이 좀 많으면 어른 대접 받으려는 의식과 무의식이 울퉁불퉁 가끔은 뾰족뾰족 흉측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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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간의 대립 문제나 업무 비효율까지도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만든다.
모두가 한 번 정도는 진지하게 ‘나는 진짜 어른인가?’라는 당연한 물음을 스스로 던져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만 해도 여러 사회적 문제가 의외로 순조롭게 해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영준 저 <졸업선물 : 성공이 아닌 성장을 위한 이야기>를 참고

워렌 버핏은 이런 말을 했다.
성공하고 싶다면 남들이 욕심을 부릴 때 두려움을 품고, 남들이 두려움을 품을 때 욕심을 부려라.

과연 우리는 언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낄까?
우리가 성공을 바라보고 목표를 세워,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불시에 찾아오는 것이 있다. 바로 장애물이다.

가난이라는 벽, 건강이라는 벽, 넘을 수 없는 경쟁자라는 벽, 쓰디 쓴 패배라는 벽.
우리는 그 예상치 못한 커다란 장애물을 갑자기 마주하게 되면,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두려움은 우리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다.
‘아무것도 하지마! 어서 빨리 도망쳐! 너의 잘못이 아니야! 다 저 사람 때문이라고 변명해! 성공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야!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쉽게 포기하고 있어! 괜찮아!’라고 말이다.

 


실패나 포기라는 단어는 이제 너무 익숙해져서, 우리는 아주 쉽게 ‘나는 성공과 잘 어울리지 않아!’라고 간단하게 규정하고, 아주 작은 목표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쉽게 못박아 버린다.
늘 장애물 앞에서 쉽게 포기해버리는 우리는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에게는 아주 격한 관용을 베풀고, 그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날마다 소소한 파티를 자주 벌인다

일을 미루고 쉽게 단념하는 것, 그리고 실패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 합리화를 자랑스럽게 해대는 것. 우리는 고난과 장애물을 힘들게 극복하고 성공을 쟁취하는 강인한 정신 자세보다, 좋은 게 좋은 거야~ 그냥 인생을 즐겨! 너무 애쓰지마! 라고 설득한다. 그리고 노력과 고군분투를 경시하는 풍조와 속삭임에 쉽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인다.

이렇게 장애물 앞에서 쉽게 무너져버리는 당신을 향해, 책 <돌파력>의 저자 라이언 홀리데이는 이렇게 말한다.
“장애물 앞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봐야 한다. 지금 이 일은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인가? 만약에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지금 마주한 그 장애물을 나는 성장 기회로 역이용해야 한다.”

스티브 잡스는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배워온 규칙과 타협의 습성 때문에 현실을 잘못 규정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장애물 앞에서 아주 공격적이었고, ‘불가능해요’라고 쉽게 변명하는 사람들의 책상은 바로 다음 날 아침에 치워버리는 과감성을 보여주었다.

 

 


현실 왜곡자 즉,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장애물을 뛰어넘는 스티브 잡스만의 방법이었다.
셰익스피어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무언가를 그렇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단순하게 장애물을 바라보면 그것은 부정적인 요소로 가득할 뿐이다. 그러나 장애물 때문에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남들이 두려움을 품을 때 욕심을 부리라고 말했던 워렌 버핏의 말처럼, 모든 부정적인 요소 역시 그 뒷면에는 긍정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돌파를 위해 필요한 것은 겉과 속을 다르게 보는 것이며, 외관이 아니라 본질을 들여다보는 것에 있다.

위기가 닥칠 때 나쁜 기업은 망한다. 하지만 좋은 기업은 살아남는다. 그러나 위대한 기업은 더욱 더 발전한다.

 

오늘만 한정특가!


반드시 뛰어넘어야 하는 장애물을 마주하고 있는가?
장애물! 바로 그것은 기회라는 것을 명심하자.

라이언 홀리데이 저 <돌파력 : 스토아 철학에서 배우는 ‘스스로 운명을 바꾸는 힘’>을 참고

하루를 보내면서 친구로부터 부탁을 받고,

‘에이~ 우리 사이가 이 정도 밖에 안돼? 한 번만 도와주라.’

회사의 팀장은 승진 기회를 주겠다며 이렇게 말한다.

‘자네 키워주려는 거 알지? 그러니까 조금만 더 애써줘!’


남친에게 사랑을 표현하기도 하고,

‘우린 영원할 거야. 혹시라도 헤어지면 나 죽어버릴지도 몰라…’

부모님이 반대하는 일을 하려다 이런 말을 듣는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대학까지 보내줬더니, 너는 이런 식으로 보답하는구나?’


일상적으로 주고받았던 익숙한 이런 대화들이 모두 ‘정서적 협박’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정서적 협박이란 상대방에게 죄책감, 좌절감, 두려움 등의 부정적 감정을 느끼게 하여 결국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도록 만드는 행동이다.




정서적 협박에는 여섯 단계가 있는데, 부탁을 들어달라던 친구와의 대화를 예로 들어 자세히 살펴보자.


1) 요구 Demand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거지?’

늘 그랬듯 자연스럽게 정서적 협박자가 요구한다.


2) 저항 Resistance

‘또? 이번엔 좀 바쁜데…?’

부탁을 받은 우리는 소극적인 저항을 한다.


3) 압박 Pressure

‘왜 그래? 들어주기 싫은 거야?’

이전과 달리 시원한 답을 주지 않자, 친구는 자신도 모르게 압박을 시작한다.


4) 위협 Threat

‘에이~ 우리 사이가 이 정도밖에 안돼?’

이런 말로, 의도치는 않았지만 위협이 된다.


5) 굴복 Compliance

‘내가 진짜 바쁜데… 너니까 특별히 들어준다. 알지?’

협박이 성공했다.


6) 반복 Repetition

‘저기 이번에 내 부탁 들어줄 거지?’

이런 말과 더불어 정서적 협박이 완성된다.



쳇바퀴 돌 듯 지금까지의 과정이 반복되며, 협박은 더욱 강화된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정서적 협박의 관계로 연결된다.

대만 작가 저우무쯔는 심리상담으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정서적 협박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직접 상담을 해주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책 <정서적 협박에서 벗어나라>를 썼다.


그녀는 먼저 정서적 협박자의 마음을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기본 전략은, ‘내 요구에 따라야만 좋은 사람이 되는 거야!’이다. 협박자의 기준으로 보면, 회사에서는 시키는 일을 묵묵히 참고 잘 해야 좋은 사람이고, 연인 사이에서는 늘 옆을 지키고 서로를 갈망해야 좋은 사람이다. 부모의 요구를 따라야만 효자가 되기도 한다.


좋은 사람 프레임을 씌우면서 죄책감을 이용하려는 전략이다.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으면 이기적인 사람, 배은망덕한 자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거절하면, 그들은 화를 내면서 두 번째 전략을 이용한다.


‘다 너 때문이야!’

‘내가 지금 이렇게 화가 나고 좌절감을 느끼는 건 너 때문에 그래!’

‘내가 지금 죽고 싶은 느낌이 드는 건 너의 선택 때문이야!’라는 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우리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죄책감을 느끼며 협박에 넘어간다.


책에서 저자는 말한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나요? 상대의 감정에만 맞춰준다면, 당신의 감정은 누가 보살펴주나요? 상대의 감정은 당신의 책임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가치관을, 내 감정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내 감정을 내가 먼저 중시하지 않는다면, 타인도 나를 똑같이 대할 것입니다.

꼭 기억하세요.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해서 행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일시적인 만족, 일시적인 관계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상대방과의 사랑은 멀어져 갑니다.”


책은 ‘내 인생의 목적은 타인의 바람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타인의 부탁과 요구로 힘들게 짊어진 그 짐을 내려놓자. 이제 족쇄를 풀고 나를 돌아보자. 나는 나를 소중히 여겼는지, 내 감정을 잘 챙겼는지 살펴보자.


아직도 정서적 협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이 말을 명심하자.

‘소중한 사람에게 보여줘야 할 것은 끌려 다니는 삶이 아닌, ‘나 스스로 행복해하는 삶’이다.’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면, 계속될 관계라면, 나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같이 기뻐해줄 것이다.


책은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고 정서적 협박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라고 말한다.

나의 모습을 돌아보고 마음의 울타리를 튼튼히 세워야 한다. 어그러진 관계를 풀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나가기를 바란다.


저우무쯔 저 <정서적 협박에서 벗어나라 : 내 마음을 옭아매는 영혼의 감옥> <책그림>을 참고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유학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책이 있다.

유학의 거장인 퇴계 이황은 서른 무렵 이 책을 접한 후, 마지막 순간까지 매일 새벽마다 읽었다 한다.


실학의 거장 다산 정약용 역시 18년간의 유배생활 중 방대한 학문체계를 정리하면서,

‘그 동안의 공부를 이 책으로 매듭짓고자 한다’라고 썼다. 그 정도로 이 책은 조선의 선비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책이었다.


책이 도대체 그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길래, 조선의 대학자들이 그토록 빠져들었던 것일까?

그 책의 이름은 바로 ‘심경(心經)'이다.

심경은 주자의 제자였던 송나라 학자 진덕수(眞德秀)가 편찬한 책으로, ‘마음’에 대해 다룬 유교 경전이다.




사서삼경과 함께 주희, 주돈이, 정이천 같은 유학자의 글 중에서, 마음공부에 관한 내용을 가려 뽑아 만들었다.

사서 :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삼경 : 시경, 서경, 주역(역경)


책이 처음 나올 당시 중국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퇴계 이황이 이 책의 가치를 알아보고 적극 연구하면서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후 ‘심경’과 그 주석서인 ‘심경부주’는, ‘인간의 마음이해’를 위한 성리학자들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논어, 맹자, 중용처럼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다른 동양고전들에 비해, ‘심경’은 우리가 왜 잘 알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철저히 잊힌 책이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급격한 재건의 과정을 지나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숨가쁜 역사를 만들고 겪어왔다. 그런 현실 속에서 어쩌면 ‘마음’을 돌보는 일은 배부른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마음을 지켜내는 것에 대한 깊은 사유보다는,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치열한 쟁취의 과정을 겪은 지금 우리는 원하는 대부분을 얻게 되었지만, 급하게 쌓아 올린 만큼 우리 안의 문화는 다양한 결이 뒤섞여 분열적인 모습을 나타내기 일쑤다.

마음공부에 소홀해진 오늘날 현대인들은, 마음을 어딘가에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은 저 알아서 가는 것이고, 문제는 대체로 ‘밖’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공부를 이야기하면 언어유희 내지는 사치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결과 모두가 자신을 지킨다는 명분을 앞세워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 버렸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분노하고 거침없이 냉소를 날린다. 실익은 챙길지 모르지만, 언제부터인지 우리의 내면은 거칠고 메마르게 되었다.


맹자 고자장구(告子章句) 상(上) 편에는 이런 글이 실려있다.

‘사람들은 닭이나 개를 잃어버리면 곧 찾을 줄 알지만, 잃어버린 마음을 찾을 줄 모른다. 학문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데 있다.’


정작 가장 소중한 자신의 마음을 잃고서는 찾을 줄을 모른다. 심지어 그것을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마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곧 자아를 상실한 것과 같다. 마음은 곧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맹자는 잃어버린 인의(仁義)의 마음을 찾아 양심을 회복해야 한다며, 이것이 진정 학문의 길이라고 말했다.

다산 정약용 역시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삶의 주제도 바로 마음이었다. 다산은 정조 임금과 함께 조선 후기 개혁을 이끌었지만, 18년 간의 유배생활을 겪어야 했다.


유배 초기에는 받아주는 데가 없어, 가난한 떡장수의 좁은 집에서 뒷방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고난의 시기에 다산은 심경에 심취했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자신을 위한 마지막 공부를 마음을 다스리는 ‘심경’으로 맺고자 한다며 ‘능히 실천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결국 다산은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고난을 이겨내는 힘이며, 학문의 끝이라고 말한다.


공자는 마음이란 스스로 붙잡지 않으면 곧 어디로인지 모르게 가버린다고 했다. 마음은 이목구비의 욕망과 희로애락의 감정으로 인해 끊임없이 유혹을 받는다. 만약 단 한 순간이라도 마음을 놓아버리게 되면 천리 바깥으로 달아나 회복이 어려워진다.


현대문명이 안고 있는 문제의 대부분은 물질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것들을 다루는 인간의 마음이 어떤가에 달린 문제라고 한다.

욕심에 사로잡혀 인간의 양심을 잃어가는 지금,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번 살펴볼 때다.


조윤제 저 <다산의 마지막 공부 : 마음을 지켜낸다는 것> <BetterLife>를 참고




1) 의지력만 있으면 된다는 믿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병수는 상담 후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말씀은 잘 알겠지만, 마음의 문제는 제 의지로 고쳐볼게요.”

“우울증도 의지의 문제래요. 의지력으로 떨쳐볼게요.”


사람들은 자신이 충동을 잘 억제하는 의지력을 가졌다고 믿는 경향, 즉 ‘통제편향 Restraint Bias’이 있다. 이때 통제편향에 휘둘려 자신의 통제력을 과신하면, 거꾸로 욕구에 굴복하거나 충동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커진다.


잘 생각해보자.

우울한 기분일 때 ‘지금부터 기분 좋아지겠어!’라고 아무리 강하게 마음 먹어도 기분이 바뀌지는 않는다. 또한 이런 감정이나 정서를 억제하거나 다른 형태로 바꾸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데, 과하게 의지력을 쏟아 부으면 자아 고갈 상태에 빠져 반대의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의지력으로 내 안의 우울을 제거하려다 오히려 사소한 문제에도 화가 치밀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목표를 세워 스스로를 들볶고 있진 않은지, 요즘 들어 좀 예민해진 게 통제편향 때문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보자.




2) 쉼 없는 자기계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 자기계발에 중독되었을 확률이 높다. 우리 뇌는 생각을 만들어내는 기계라 ‘나’에 대한 생각이 시작되면 끊임없이 ‘나는 ~한 사람이다’와 같은 언어로 규정하기를 바란다.

‘나는 엄마 말을 잘 듣는 착한 사람이야’

‘나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야’와 같이 더불어 ‘좋다’ 또는 ‘나쁘다’라는 판단이 뒤따른다.


모든 상황에서 자기계발 욕구를 불태우며 스스로를 판단하려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고, 힘든 일을 겪어도 화를 내지 못하게 된다. 또한 스스로 분석하려는 심리가 강할수록 스트레스에 노출되기 쉽다.


SNS에 끊임없이 나를 노출하는 경우 역시,

‘내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럴 듯 한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괜찮게 살고 있는지’를 관찰하며, 나를 분석하고 더 나아지려 애쓰는 것이다.


사소한 것까지 모두 분석하는 것으로 정말 내 마음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있을까? 우울함만 더 키우는 건 아닐까?




3) 복잡한 감정은 나쁘다는 편견


사람이 느끼는 감정 중에 ‘양가감정’이라는 게 있다.

사람이나 사물을 두고 선택의 순간에 놓일 때 심플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동시에 상반된 두 가지 이상의 복합적인 느낌이 들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는 무심함에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해로운 음식이라는 걸 알면서도 먹으면서 드는 행복감을 포기할 수 없을 때 드는 양가감정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다.

생각해보면 감정이라는 건 긍정과 부정이 함께 올 때가 많다.


이상한 게 아니다. 그 때문에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심란한 동시에 즐겁고 흥분될 수 있을까? 물론이다.

한 곳으로만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균형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며, 감정이 복잡한 것 역시 뇌의 자동 조절장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다는 증거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인생은 복잡해서 힘든 게 아니다.

한 가지 역할만 하도록 강요 받기 때문에, 단순한 기준에 맞춰 살아야 하는 환경 때문에, 복잡한 감정을 힘들게 느끼는 것뿐이다.


그러니 다양한 자아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으로 나를 데려가 보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자아를 발견한 기쁨에 스트레스는 자연스레 치유될 것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 찰리 채플린 -


김병수 저 <마음의 사생활 : 마음을 압박하는 심리에 관한 고정관념들> <지식을 말하다>를 참고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완벽한 선택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없이 많은 결정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인재라고 인정받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의사결정에 필요한 중요한 특징이 있다.

바로 ‘비판적 사고’.

감정이나 편견 또는 권위에 사로잡히지 않고, 어떤 것을 객관적으로 분석한 후 결론을 내리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의사결정을 할 때 비판적 사고를 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중요하지만 쉽지 않은 비판적 사고.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까?


1) 중요한 때만 사용한다

우리는 하루에 수많은 결정을 하면서 살아간다. 매 순간 비판적 사고를 한다면,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해지고 정작 필요할 때는 감정이 무디어진다.

지치지 않기 위해서는 필요한 때에만 적절히 사용해야 한다.


매일 마시는 커피를 고르는데 사는데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새 차를 사는 경우에는 신중하고 충분하게 활용해야 한다.




2) 아침에 이용하자

사람들은 의사결정을 위한 에너지를 하루 종일 사용한다. 에너지가 소진되는 저녁에는 좋지 않은 결정을 할 확률이 훨씬 높아진다.

수많은 결정에 따른 피로를 피해서, 중요한 문제는 아침에 의사결정 하는 습관을 갖자.


3) 한걸음 물러난다

비판적 사고를 너무 잘해도 때로는 문제가 된다. 어떤 이들은 판단력이 빨라서 어려운 문제를 막힘 없이 잘 풀어낸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진짜배기 비판적 사고는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판적 사고의 아주 중요한 부분인 ‘반성적 사고’가 필요하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논쟁이나 문제를 더 오랫동안 관찰하는 것이다.

연구에 의하면, 어떤 결정을 10초 미룬 뒤 했을 때의 정확도가 더 높아졌다고 한다. 핵심은 10초만 더 기다리면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고,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4) 일부러 비판을 해보라

우리의 직감은 늘 무엇을 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문제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직감은, 종종 편향되어 있다는 점이다.


직감의 오류를 피하고 싶다면, 일부러 비판을 해보자. 떠오르는 것 말고도 다른 대안이 있을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은 대안을 내놓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방편이기도 하다.

직감과 대안을 비교하다 보면, 비판적 사고를 통해 더 객관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5) 감정은 내려놓는다

비판적 사고를 연습하기 좋은 경우는, 여러 견해를 들을 수 있는 토론이다. 개인적 견해가 강한 주제에 대해 토론할 때 감정을 내려놓지 않으면, 감정이 앞서 객관적으로 생각하기 어렵게 된다.


너무 많은 것을 읽으면서

너무 적게 생각하는 사람은,

게으른 사고 습관 속에

함몰될 것이다.

- 아인슈타인 -


Christopher Dwyer 저 <5 Tips for Critical Thinking> <Change Ground>를 참고




‘최대리는 다 좋은데, 일을 할 때 조금 빨리 했으면 좋겠어!’

‘최대리! 일은 빨리 한다고 좋은 게 아냐. 무조건 천천히 꼼꼼하게 해야 해!’


우리들은 이따금 이런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습니다. 단점을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하면서 상대방이 문제를 해결하길 원하는 거죠. 물론 스스로 몰랐던 단점을 일깨워주는 취지 자체는 좋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숨겨진 문제점을 해결해서 도움이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죠.


그렇지만 충고라는 방패에 숨어 면전에서 치부를 들춰내는 말들을 웃으며 받아들일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타샤 유리치 (심리학자, 경영 컨설턴트,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정적 피드백이 항상 도움이 되는 건 아닙니다. 조직 심리학자로서 수많은 사람들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쏟아지는 부정적 피드백 중에 추후 도움이 되었던 건 극소수뿐입니다. 대부분의 피드백은 진심을 가장한 인신공격이거나 모순되고 정확하지 않은 엉터리 조언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부정적 피드백이 성장에 도움이 되더라도 정말 도움이 되는 피드백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해내지 못하면, 사공 많은 배가 산으로 가듯 수많은 피드백 속에 묻힌 채 끝없는 고통을 받을 확률만 높아집니다.”


그렇다면 피드백과 조언 속에서 어떻게 자신에게 도움되는 것을 골라내고, 상처받지 않음과 동시에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을까요?


다음 3가지 방법을 참고하여 자신의 상황에 응용한다면,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서두르지 마세요


피드백에는 여러분의 단점이 들어있습니다. 자신의 단점을 남의 입을 통해 듣는 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죠. 흥미로운 점은 설령 이로부터 교훈을 얻어 성공한 사람들도 피드백에서 오는 불쾌함만큼은 견딜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불쾌함을 참아내고 피드백으로부터 올바른 교훈을 얻게 되었을까요?

피드백 때문에 자신의 감정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절대 이를 곧바로 표출해서는 안됩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평정심을 되찾은 다음에 그 조언을 차근차근 분석해야 숨어있는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평정심을 되찾는 심리 테크닉 중에 최고로 꼽히는 방법 중 하나는 ‘감정 옮기기’인데, 어떤 조언 때문에 감정의 동요를 겪고 있다면, 시간을 내어 종이에 차분하게 자신이 느끼는 기분을 적어보세요. 불안정하고 불명확한 감정을 명확히 정의하고 객관화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피드백의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2) 데이터를 더 모으세요


이런 명언이 있습니다.

‘우리가 듣는 모든 것은 그저 의견이며 절대 사실이 아니다.’


이제껏 들어온 많은 평가는 그 상황에서의 나에 대한 평가일 뿐 나 자체에 대한 평가는 아닙니다. 게다가 우리를 평가한 사람들이 완벽하게 맞는다는 보장도 없지요. 그들도 자신의 관점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불완전한 인간이며,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모순되고 틀린 평가를 내놓을 수 있습니다. 평가한 사람의 지위나 학력, 능력에 상관없이 말이죠.


자신이 만약 피드백을 받았다면, 이를 곧바로 행동에 옮기기 전에 주위 사람들에게 꼭 의견을 물어보세요.

바람직한 평가자의 수는 보통 4~5명 정도가 적당하며 자신과 일상적으로 친한 사람, 업무적으로 친한 사람 그리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봐주는 사람을 포함시켜 균형을 이루는 것이 좋습니다.

추가적인 데이터를 통해 정확도와 신뢰성이 높아진 피드백은 분명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3) 굳이 변화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부분의 피드백은 변화를 요구합니다.

미처 몰랐던 부분을 알려줌으로써 듣는 사람이 문제점을 개선하길 바라는 거죠. 하지만 흔히 알려진 인식과 달리 피드백에 따른 변화가 꼭 좋은 건 아닙니다.

피드백은 얼마든지 부정확하고 편향될 수 있으며, 여러 종류의 피드백에 맞춰 변화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고 도움이 되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도저히 피드백에 맞춰 변화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면, 차라리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합의를 이끌어내세요. 이미 익숙해진 자신의 소통 스타일이 몇몇 사람들의 반감을 이끌어낸다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를 드러내되,

① 지적해줘서 고맙다는 표현을 하고

② 서로의 반감을 줄일 수 있는 합의점을 제시하세요.


그렇게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면, 어느새 팀원들은 그런 스타일을 단점이 아닌 특색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며, 굳이 이를 억지로 고치기 위해 힘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부정적 의견들은 사라질 겁니다.


부정적 피드백을 올바르게 받아들이면 엄청난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지만,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거나 무분별하게 따르려 한다면, 자신을 망치는 치명적인 독약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세요.


타샤 유리치의 <The Right Way to Respond to Negative Feedback> <체인지 그라운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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