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샤넬을 있게 만든 절대적인 인물, 칼 라거펠트 Karl Lagerfeld는 1933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스웨덴 출신으로 독일 함부르크에서 연유 사업을 꽤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덕분에 칼 라거펠트는 비교적 부유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고, 전쟁 중에 그의 가족도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그림에 뛰어났고 유년기부터 옷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어렸을 때 옷을 만지면 대략 언제 만들어진 옷감인지 파악할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그가 19살 되던 1952년, 패션의 중심인 파리로 이주하게 된다. 옷에 있어서는 탁월한 천재성을 보이던 그는 파리로 옮긴지 2년만에, 국제 양모사무국이 주최한 디자인 대회에서 당당히 코트부문 1위에 올랐다.
이때 1등을 하면서 당시 거장이자 브랜드 발망을 만든 피에르 발망 밑으로 들어가게 된다.

칼 라거펠트의 초창기 디자인들은 큰 호평을 받지는 못했다.
실제 20대 때 내놓은 디자인들은 각 매체에서 호평보다는 악평을 많이 받았다. 이후 약 9년간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하며 실력을 쌓은 그는 1963년 독립을 선언하고, 프리랜서 디자이너의 길을 걷기로 한다.
이것은 나중에 칼의 신의 한수가 된다.

 


프리를 선언한지 1년만에 그는 끌로이의 디자인팀에 합류하고, 다음 해에는 펜디의 디자인팀에도 합류하게 된다. 프리랜서 디자이너였으므로 한 브랜드와만 작업을 하지 않고 다양한 브랜드와 작업을 할 수 있었는데, 당시 너무 예술성과 최고급에만 치중되어있던 파리의 패션 디자인에 환멸을 느끼고, 좀 더 대중적이고 젊은 세대의 취향에 맞는 옷을 만들기 시작한다.

프리랜서 이전의 브랜드 디자이너 때는 대세를 따라가며 만들던 옷이 별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만의 길을 걸으면서 대중적으로나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82년 세계 패션 역사에 길이 남을 깜짝 발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샤넬의 칼 라거펠트 영입이었다.

당시 파리의 패션계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예술적인 옷과는 거리가 먼 기성복을 만드는, 심지어 프랑스인도 아닌 독일인인 그를 샤넬이 영입한다고 했을 때, 내외부적으로 엄청난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샤넬의 소유주들은 갈수록 샤넬의 명성이 떨어지고 감각도 올드 해진다고 판단하여, 분위기를 뒤엎을 게임메이커로 그를 영입한 것이었다.

1982년 1월, 첫 샤넬의 컬렉션 무대를 선보인 그에게 언론들은 죽은 샤넬을 환생시켰다며 극찬했다.
1984년 그는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면서, 지금까지의 샤넬 제국을 만드는데 절대적인 인물이 되었다.
샤넬의 시그니처인 샤넬의 로고, 트위드 수트, 까밀리아, 퀼팅백 등은 모두 그가 창조해낸 작품들이다.

그는 샤넬의 디자인을 젊은 세대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감각으로 바꾸지만, 소재는 프랑스에서도 하이엔드 공방에서 공수 받는 최고급만을 사용해서 젊은 감각의 최고급 럭셔리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나갔다.
실제로 그의 최근 컬렉션들을 보면 옷은 물론이고, 컬렉션의 무대 하나하나를 어떻게 70, 80이 넘는 나이에 그런 현대적 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 칼 라거펠트까지, 샤넬, 펜디, 칼 가러펠트 등 총 3개의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최근 펜디에서 필라의 로고를 오마쥬한 감각을 보면, 나이를 거꾸로 먹는 감각을 보여주는 듯한 모습이다.

 


책을 좋아하는 독일인답게 그 역시 독서를 매우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출판업과 서점 사업을 하는 7L의 소유주이기도 하고, 그의 집에는 20만권 이상의 책을 보유하고 있다.
또 사진에 관심을 보이며 이를 배운 후부터는 광고캠페인과 패션 잡지의 화보 촬영을 직접 하는 등, 사진에서도 엄청난 감각을 보여주었다.

그 역시 톰포드와 비슷하게 완벽주의자 성향을 보이는데, 그의 이미지를 통일하기 위해 언제나 블랙수트, 블랙 선글라스, 백발의 포니테일을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부 활동을 할 때 포니테일과 선글라스를 착용하지 않으면, 절대 촬영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2000년도 당시 남자 옷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에디슬리먼의 디올 옴므의 스키니진을 입고 싶었지만, 자신에게 맞는 사이즈가 없어서 13개월 동안 42Kg을 감량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그의 재산은 약 2천억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는 디자인 활동을 위해 파리의 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데, 그의 집은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수많은 책으로 보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또 얼마 전에는 고향인 함부르크에 있는 그의 맨션이 매물로 나왔었는데, 기품 있는 이 집 앞에는 엘베강을 볼 수 있는 풍경이 펼쳐져 있고, 집 전체는 대리석과 각종 고급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 집의 가격은 약 120억원이었다.

그의 반려묘이던 고양이 슈페트 라거펠트 역시 엄청난 팬을 가지고 있는데, 이 고양이는 칼과 함께 전용기를 타고 다니며 2명의 전용 집사와 전문의까지 있다.
고양이의 인스타그램이 따로 있는데 팔로워만 12만명이고, 2014년에는 광고출연으로만 약 35억원을 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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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사료나 간식 등의 광고 요청도 물밀듯이 들어오지만, 그런 광고를 찍기에는 고양이가 너무 기품있다고 칼 라거펠트가 광고를 거부한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그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단 한가지가 있었으니, 바로 죽음이었다.

그는 2018년부터 급격히 허약해지면서, 2019년 2월 19일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패션계뿐 아니라 전 세계에 남긴 유산은 아마도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실질적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직업을 패션계에 첫 뿌리를 심은 인물이었으며, 독일인으로서 파리의 패션문화를 바꿔놓은 인물이기도 했다.

<Money Swagger>를 참고

포브스 2018년 순위 발표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브랜드 가치가 가장 높은 기업은 애플이었다.

그러면 전 세계 모든 패션 브랜드 중에서 가치가 제일 높은 기업은 어디일까?

그 1위는 ‘루이비통 LOUIS VUITTON’이다.

매년 나이키와 1,2위 자리를 놓고 다투지만, 이번 왕관은 루이비통이 차지했다.


루이비통은 단순히 하나의 브랜드가 아닌 세계 최대의 패션&주류 그룹인 Louis Vuitton & Moet Hennessy, 줄여서 LVMH이다.


주류를 제외하고 패션 쪽만 보더라도 패션 제국이라는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데, LVMH안에 속한 루이비통 이외의 패션 관련 브랜드만해도 디올, 펜디, 지방시, 켄조, 마크제이콥스, 셀린느, 로로피아나, 리모와 등이 있고, 거기에 불가리, 위블로, 태그호이어, 제니스 등의 시계 브랜드, 겔랑, 메이크업포에버, 프레쉬, 베네피트같은 코스메틱, 그리고 세포라, 르 봉마르쉐 백화점, DFS면세점 같은 유통망까지 보유하고 있어 그야말로 패션하우스의 어벤져스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제국을 가진 루이비통도 처음에는 포장가게부터 시작했다는데, 그들은 어떻게 이런 패션 제국을 만들었는지 기록을 뒤져 정리해보자.



창립자는 루이비통 Louis Vuitton이다.

1821년 프랑스 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14살에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집을 나왔는데, 어린 나이에도 그가 첫 목표로 삼은 도시는 파리였다. 당시엔 비행기나 기차는 커녕 자동차도 없던 시절이었다.

온갖 허드렛일로 입에 풀칠을 하며 대도시를 향해 조금씩 이동하면서, 2년만에 파리에 도착했다고 한다.


파리에 도착하면서부터 그는 상류층이 이용할만한 여행용 고급가방을 만들어야겠다는 꿈을 가진다. 실제로 이때는 여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곧 상류층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귀족이 아닌 일반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며 자신이 살던 도시 외에는, 평생 동안 다른 곳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루이비통은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파리에서 가장 유명했던 가방 장인을 찾아갔고, 그의 제자로 들어가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배우며 그가 한 일은 귀족들의 짐을 싸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루이비통의 짐 싸는 방법은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디테일이 남들과는 달라, 귀족들 사이에서 최고의 포장 전문가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나폴레옹 3세의 황후인 외제니의 전담 패커가 되었다.


1854년 루이비통은 그간의 노력을 마침내 보상받게 된다. 외제니 황후의 후원으로 자신의 매장을 열었는데, 그가 파리에 온지 17년만의 일이었다.

루이비통의 이름을 걸고 낸 매장은 포장전문 가게였다. 이미 귀족들 사이에서는 최고로 포지셔닝 되었고, 거기에다 황후의 전속 패커라는 이력이 이미 붙어 있었다.


그의 포장가게는 말 그대로 번창하며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고, 그 당시 프랑스의 경제적 호황과 맞물려 대박이 났다. 돈 버는 사람은 물론이고 당시 휴양지로 여행을 가는 사람도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한다.

그 당시 제작됐던 여행용 트렁크들은 목재로 만든, 무겁고 관처럼 생겨 쌓기가 매우 어려운 모양이었다.




루이비통은 파리에 온 후 20년이 넘는 동안 꿈꾸었던 여행용 트렁크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제작된 트렁크는 캔버스를 사용해 가볍고 전체가 각진 사각형 모양으로 여러 개를 적재하기도 편했다.

또한 프랑스 상류층들이 좋아할만한 고급스러운 디자인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가 트렁크를 발매하자마자 후원자였던 황후는 물론이고, 사회 저명 인사들이 루이비통 트렁크를 구입하면서 발매 초기부터 대단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는 디자인이나 상표 등의 지적재산권이라는 개념이 없거나 모호하던 시절이었다. 루이비통이 만든 트렁크가 인기를 끌자, 많은 공방들이 비슷한 스타일의 모조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루이비통과 그의 아들 조르주 비통은 모조품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고, 다른 모조품과 차이점을 한눈에 알려주려는 목적으로 그들은 역사적인 ‘다미에 Damier 문양’을 개발했다.

바둑판 모양의 격자 무늬 안에 자신들의 로고를 새긴 다미에는, 많은 패션하우스들이 자신의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차별화하는 문양의 시초가 되었다.


루이비통이 사망하고 아들인 조르주 비통이 경영권을 물려받으면서, 그는 루이비통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먼저 그는 현재의 루이비통의 상징인 모노그램을 창안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루이비통의 가장 상징적인 문양이 되어있는데, 지적재산권이 애매한 바둑판 무늬에서 아예 LV를 교차하여 사용한 모노그램은, 다른 브랜드가 따라 할 수 없는 독창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더구나 트렁크에만 한정되었던 라인을 다양한 가방을 만들면서 확장해나갔는데, 지금의 대표적인 키폴백이나 스피디백 등은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특히 스피디백은 길거리에서 3초에 한번은 볼 수 있는 가방이라 하여 3초백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1900년대 후반까지 루이비통은 대를 이어가며 계속 가족경영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1987년 루이비통은 당시 모에샹동&헤네시 그룹과 더 큰 기회를 잡기 위해 합병을 하게 된다. 이때의 합병으로 현재 LVMH 회장이자 유럽에서 가장 돈이 많은 베르나르 아르노가 등장하는데, 아르노는 자신이 가진 돈을 LVMH에 몰빵하면서 1인자가 되었고, 루이비통 가족들은 서서히 경영권을 잃어갔다.


합병 10년 후 루이비통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를 수석디자이너로 합류시키면서, 클래식 스타일과 트렌드를 함께 잡는 브랜드로 성장한다.

루이비통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이끄는 이유로 마크 제이콥스의 힘을 무시할 수 없는데, 그는 1997년부터 2014년까지 루이비통을 이끌면서 세상에서 가장 잘 팔리는 브랜드로 만들었다.


루이비통은 현재 쟁쟁한 브랜드가 모인 LVMH 안에서도 한 해 10조원이 넘는 매출을 올려 전체 매출의 3분의 1 가량을 차지하며, 최근에는 오프화이트의 버질 아블로 Virgil Abloh 같은 신선한 인물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앞세우면서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앞으로도 루이비통은 계속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최강자로 군림할 수 있을까? 아니면 새로운 강자가 그들의 자리를 대체할까?


<아보카도> <Money Swagger>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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