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 사망유희 문턱까지 갔다가 불사조처럼 기적으로 부활한 브랜드, 지금은 또 가장 핫하고 트렌디한 아이콘, ‘구찌 GUCCI’를 알아보자.

유럽 명품이 대부분 그렇듯 GUCCI도 창립자인 구찌오 구찌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보는 약간 진부한 로고 GG는, 그의 이름 Guccio Gucci의 앞머리를 딴 것이다.
태어났을 때 그의 집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밀짚모자를 만드는 가업을 이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구찌는 사람들이 더 이상 밀짚모자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업인 모자 제조기술을 배우기를 거부했다. 이런~ 파릇파릇한 싹수가 있나~!

그리고는 16살이 되던 해 런던으로 건너간다. 런던에서 그가 처음 한 일은 당시 가장 럭셔리하고 유명했던 사보이 호텔을 찾아갔다.
지금도 런던을 대표하는 호텔로 당시에도,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 상류층이 즐겨 찾는 호텔이었다.

그는 이 호텔에서 벨보이로 일하며 귀족과 상류층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들 문화는 어떤지 직접 몸으로 체험했다.
벨보이의 전문 과목인 상류층의 다양한 고급 가방을 접하면서, 그들을 위한 가죽 가방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렇게 사보이 호텔에서 5년 동안 일한 후 그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갔다. 피렌체는 그때도 세계 최고의 가죽공방이 여러 곳 있는 도시였다.
그는 가죽공방 한 곳에서 거의 20년간 기술을 갈고닦는다. 그의 자유 의지였을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을까?

 

 


그의 나이 40이 되던 해 1920년, 그는 드디어 피렌체에서 그의 이름을 딴 매장 ‘G. GUCCI’를 오픈한다. 이것을 오픈하려고 5년간 호텔 벨보이로 일하며 귀족들의 스타일을 파악했고, 그 스타일을 직접 만들기 위해 가죽공방에서 19년이라는 세월 동안 기술을 갈고닦았다. 좋게 해석해서 그렇다.

초기에는 승마용품 위주의 가죽제품을 만들다가 가방, 신발, 벨트 등으로 제품군을 확장해 나가면서 구찌는 이름값을 시작한다.
특히 구찌오 구찌의 장남 알도 구찌가 천재적 경영수완을 발휘해서, 구찌를 미국, 일본, 홍콩 등 전 세계적인 글로벌 브랜드로 만들게 된다.

하지만 구찌는 2세에서 3세 경영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가족 간의 불화가 생기면서 위기를 맞는다. 3세 중 파올로 구찌는 도중에 자신만의 ‘파올로 구찌 PAOLO GUCCI’라는 저렴한 브랜드를 만들면서, 구찌의 명성은 더욱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런 성장통 중에 구찌는 재정난도 겪었다. 구찌 가족들은 구찌를 다시 살리기 위해 가족 위주의 경영에서 다방면으로 새로운 인재를 모시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구찌 경영진은 신의 한수를 두게 되는데, 당시 29살밖에 되지 않았던 톰포드를 구찌 디자인팀에 합류시킨다.

톰포드는 당시 마크 제이콥스와 함께 뉴욕을 대표하는 천재 디자이너였다. 그의 감각은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었고, 디자인팀에 합류한지 5년만에 구찌의 옷, 선글라스, 향수, 광고, 매장까지 모든 것을 책임지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CD의 자리에 오른다.

톰포드는 당시 파격을 넘어 충격적이던 도발적 광고와 컬렉션으로, 구찌를 단숨에 가장 섹시한 브랜드로 살려낸다.
그는 1994년 CD를 맡고 10년간 구찌를 이끌면서 2002년에는 부사장 자리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2004년 지금은 케어링 KERING으로 이름을 바꾼 당시의 PPR그룹은 구찌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케어링은 현재 패션제국 LVMH 다음으로 명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거대 회사다.
구찌를 비롯해서  BOTTEGA VENETA, BALENCIAGA,  SAINT LAURENT 등의 명품부터 푸마 같은 스포츠 브랜드까지 다양한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케어링 그룹의 경영진은 구찌가 톰포드의 손에 좌지우지 되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결국 톰포드와 그룹은 갈등을 겪게 되고, 톰포드는 구찌를 떠나게 된다.
이후 구찌의 10년은 프리다 지아니니가 이끌게 된다. 그녀는 당시 구찌의 CEO의 연인이기도 했지만, 훌륭한 디자이너였다.

하지만 이전 톰포드의 명성이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그녀가 이끌었던 구찌는 컨셉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구찌의 매출은 해마다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녀도 회사와 갈등을 겪으면서 남편과 동반 퇴출이라는 아쉬움을 남기고 구찌를 떠났다.

갑작스럽게 그녀가 구찌를 나오게 되면서, 다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누가 될 것이냐라는 추측이 무성했다. 이미 전설이 된 에디 슬리먼부터 리카르도 티시까지 유명한 인물들은 모두 후보로 거론되었다.
동시에 여러 개의 브랜드를 겸업하는 것이 허용되는 유럽의 문화에서는 누가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구찌가 다음 CD를 발표하자 사람들은 놀라움보다 의문에 빠졌다.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알렉산드로 미켈레였는데, 지아니니의 오른팔이긴 했지만, 워낙 내성적 성격 때문에 그를 아는 일반인은 거의 드물었다.

이런 도박에 가까운 시도는 구찌에게 신선함과 새로움을 안겨주었고, 그 결과 구찌는 다시 한번 불사조처럼 살아나게 된다.
힙이란 것의 끝을 보여주는 그의 다양한 시도는 스트릿패션을 주도하는 전 세계 셀럽들을 사로잡았고, 구찌의 매출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게 된다.

특히 일부러 로고를 틀리게 쓰거나, 코코카피탄과의 협업을 한 제품들은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최근엔 알 수 없는 모델의 헤어스타일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는데, 한 때 팔리지 않아 세일을 해도 텅텅 비었던 매장은 이제 세일을 하지 않아도 줄을 서야 하는 핫한 브랜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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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로 2016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핸드백 매출을 올린 브랜드는 구찌였다. 미국의 랩스타 릴펌프의 구찌갱, 비와이의 구찌뱅크, 제시의 구찌 등 전 세계의 아티스트들은 구찌 찬양 노래를 수없이 만들어내면서, 구찌는 가장 트렌디한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올해도 구찌는 돼지 해를 맞아 디즈니의 아기돼지 3형제를 구찌백에 넣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과연 알렉산드로 미켈레의 창의력은 어디까지 가게 될까?

출처 :  <Money Swagger>를 참고

포브스 2018년 순위 발표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브랜드 가치가 가장 높은 기업은 애플이었다.

그러면 전 세계 모든 패션 브랜드 중에서 가치가 제일 높은 기업은 어디일까?

그 1위는 ‘루이비통 LOUIS VUITTON’이다.

매년 나이키와 1,2위 자리를 놓고 다투지만, 이번 왕관은 루이비통이 차지했다.


루이비통은 단순히 하나의 브랜드가 아닌 세계 최대의 패션&주류 그룹인 Louis Vuitton & Moet Hennessy, 줄여서 LVMH이다.


주류를 제외하고 패션 쪽만 보더라도 패션 제국이라는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데, LVMH안에 속한 루이비통 이외의 패션 관련 브랜드만해도 디올, 펜디, 지방시, 켄조, 마크제이콥스, 셀린느, 로로피아나, 리모와 등이 있고, 거기에 불가리, 위블로, 태그호이어, 제니스 등의 시계 브랜드, 겔랑, 메이크업포에버, 프레쉬, 베네피트같은 코스메틱, 그리고 세포라, 르 봉마르쉐 백화점, DFS면세점 같은 유통망까지 보유하고 있어 그야말로 패션하우스의 어벤져스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제국을 가진 루이비통도 처음에는 포장가게부터 시작했다는데, 그들은 어떻게 이런 패션 제국을 만들었는지 기록을 뒤져 정리해보자.



창립자는 루이비통 Louis Vuitton이다.

1821년 프랑스 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14살에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집을 나왔는데, 어린 나이에도 그가 첫 목표로 삼은 도시는 파리였다. 당시엔 비행기나 기차는 커녕 자동차도 없던 시절이었다.

온갖 허드렛일로 입에 풀칠을 하며 대도시를 향해 조금씩 이동하면서, 2년만에 파리에 도착했다고 한다.


파리에 도착하면서부터 그는 상류층이 이용할만한 여행용 고급가방을 만들어야겠다는 꿈을 가진다. 실제로 이때는 여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곧 상류층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귀족이 아닌 일반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며 자신이 살던 도시 외에는, 평생 동안 다른 곳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루이비통은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파리에서 가장 유명했던 가방 장인을 찾아갔고, 그의 제자로 들어가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배우며 그가 한 일은 귀족들의 짐을 싸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루이비통의 짐 싸는 방법은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디테일이 남들과는 달라, 귀족들 사이에서 최고의 포장 전문가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나폴레옹 3세의 황후인 외제니의 전담 패커가 되었다.


1854년 루이비통은 그간의 노력을 마침내 보상받게 된다. 외제니 황후의 후원으로 자신의 매장을 열었는데, 그가 파리에 온지 17년만의 일이었다.

루이비통의 이름을 걸고 낸 매장은 포장전문 가게였다. 이미 귀족들 사이에서는 최고로 포지셔닝 되었고, 거기에다 황후의 전속 패커라는 이력이 이미 붙어 있었다.


그의 포장가게는 말 그대로 번창하며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고, 그 당시 프랑스의 경제적 호황과 맞물려 대박이 났다. 돈 버는 사람은 물론이고 당시 휴양지로 여행을 가는 사람도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한다.

그 당시 제작됐던 여행용 트렁크들은 목재로 만든, 무겁고 관처럼 생겨 쌓기가 매우 어려운 모양이었다.




루이비통은 파리에 온 후 20년이 넘는 동안 꿈꾸었던 여행용 트렁크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제작된 트렁크는 캔버스를 사용해 가볍고 전체가 각진 사각형 모양으로 여러 개를 적재하기도 편했다.

또한 프랑스 상류층들이 좋아할만한 고급스러운 디자인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가 트렁크를 발매하자마자 후원자였던 황후는 물론이고, 사회 저명 인사들이 루이비통 트렁크를 구입하면서 발매 초기부터 대단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는 디자인이나 상표 등의 지적재산권이라는 개념이 없거나 모호하던 시절이었다. 루이비통이 만든 트렁크가 인기를 끌자, 많은 공방들이 비슷한 스타일의 모조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루이비통과 그의 아들 조르주 비통은 모조품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고, 다른 모조품과 차이점을 한눈에 알려주려는 목적으로 그들은 역사적인 ‘다미에 Damier 문양’을 개발했다.

바둑판 모양의 격자 무늬 안에 자신들의 로고를 새긴 다미에는, 많은 패션하우스들이 자신의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차별화하는 문양의 시초가 되었다.


루이비통이 사망하고 아들인 조르주 비통이 경영권을 물려받으면서, 그는 루이비통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먼저 그는 현재의 루이비통의 상징인 모노그램을 창안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루이비통의 가장 상징적인 문양이 되어있는데, 지적재산권이 애매한 바둑판 무늬에서 아예 LV를 교차하여 사용한 모노그램은, 다른 브랜드가 따라 할 수 없는 독창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더구나 트렁크에만 한정되었던 라인을 다양한 가방을 만들면서 확장해나갔는데, 지금의 대표적인 키폴백이나 스피디백 등은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특히 스피디백은 길거리에서 3초에 한번은 볼 수 있는 가방이라 하여 3초백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1900년대 후반까지 루이비통은 대를 이어가며 계속 가족경영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1987년 루이비통은 당시 모에샹동&헤네시 그룹과 더 큰 기회를 잡기 위해 합병을 하게 된다. 이때의 합병으로 현재 LVMH 회장이자 유럽에서 가장 돈이 많은 베르나르 아르노가 등장하는데, 아르노는 자신이 가진 돈을 LVMH에 몰빵하면서 1인자가 되었고, 루이비통 가족들은 서서히 경영권을 잃어갔다.


합병 10년 후 루이비통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를 수석디자이너로 합류시키면서, 클래식 스타일과 트렌드를 함께 잡는 브랜드로 성장한다.

루이비통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이끄는 이유로 마크 제이콥스의 힘을 무시할 수 없는데, 그는 1997년부터 2014년까지 루이비통을 이끌면서 세상에서 가장 잘 팔리는 브랜드로 만들었다.


루이비통은 현재 쟁쟁한 브랜드가 모인 LVMH 안에서도 한 해 10조원이 넘는 매출을 올려 전체 매출의 3분의 1 가량을 차지하며, 최근에는 오프화이트의 버질 아블로 Virgil Abloh 같은 신선한 인물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앞세우면서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앞으로도 루이비통은 계속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최강자로 군림할 수 있을까? 아니면 새로운 강자가 그들의 자리를 대체할까?


<아보카도> <Money Swagger>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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