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말춤 추던 사나이는 이 춤 하나로 2012년부터 약 5년 동안 세계를 정복했다.
초통령 헤이지니는 TV유치원에 출근을 시작했고, 축구BJ 감스트는 MBC 러시아 월드컵을 해설한 뒤 K리그 해설자로 데뷔했다.

2018년 초중고 희망직업 조사에서, 운동선수, 교사, 의사, 조리사 다음으로 유튜버가 순위에 올랐다. 단순한 동영상 플랫폼을 넘어, 이미 일상이 된 유튜브 브랜드를 읽어보자.

1) 창업자 스티브 첸
대만에서 1978년 태어나 8살에 미국에 이민했고 일리노이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그는 대학 졸업 한 학기 전에 선배들로부터 한 회사의 입사 권유를 받는다. 전자결제업체 ‘페이팔 PayPal’이었다.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온라인 전자결제 시스템 기업이지만, 이때만해도 창업 초기였다.
그렇게 1999년 21살에 페이팔에 입사했다.

입사한지 3년이 지난 2002년 페이팔이 나스닥에 상장되면서, 그는 200만 달러가 넘는 연봉을 받게 된다. 같은 해 온라인 쇼핑몰 이베이가 페이팔을 인수하고, 그는 자연스레 이베이의 매니저가 된다. 그런데 이베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만의 사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2) 유튜브의 탄생
2004년만 해도 너도나도 캠코더를 들고 다니면서 일상 촬영이 유행했다.
그 해 마이클 잭슨의 동생 자넷 잭슨이 슈퍼볼 공연 도중, 실수로 가슴을 노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자넷 잭슨의 영상을 돌려보고 싶어했고, 스티브 첸은 여기서 영감을 얻게 된다. “그거 봤어?”

누구나 쉽게 동영상을 올리고 볼 수 있는 웹사이트 ‘유튜브’. You는 모든 사람들, Tube는 TV 브라운관을 뜻하는데, 모든 이들이 시청자이자 제작자가 되도록 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2005년 2월 15일 캘리포니아의 피자가게 2층에서 유튜브가 설립됐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23일 유튜브에 첫 동영상이 업로드됐는데, 유튜브의 창립멤버 조드 카림이 올린 <Me at the Zoo>, 업로드 된지 14년된 이 19초짜리 영상은 현재 6,500만 조회수에 육박하고 있다.

3) 흑역사
사실 유튜브는 시작부터 쪽박의 길을 걸었다.
이용자라고 해봐야 스티브 첸, 조드 카림, 채드 헐리 등 창업자 3명이 전부였는데, 초기 모습을 조금 살펴보자.
성별과 찾는 사람 연령 등을 입력하는 칸이 있었는데, 이용자가 사진을 올리면 다른 이용자들이 매력을 평가하는, 동물농장 콘테스트 같은 분위기였다. 결국 HOTorNOT.com의 동영상 버전은 폭망했다.

그들은 초심으로 돌아가 어떤 것이든 사용자가 원하는 영상을 올릴 수 있도록 컨셉을 바꾼 뒤, 이용자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4) 100만뷰 영상 탄생
2005년 9월 유튜브 최초 백만뷰 영상이 탄생했다.
바로 호나우지뉴가 등장하는 나이키 광고 <Touch of Gold>가 대박 나면서, 유튜브는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사이트가 된다. 그리고 2006년 7월에 일일 65,000개 영상 업로드와 조회수 1억회를 돌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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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구글 vs 야후 인수 협상
당시 급성장하는 유튜브를 눈독 들이는 기업들이 많았는데, 첫 미팅은 Yahoo와 가졌다.
야후의 공동창업자 제리 양은 스티브 첸과 같은 대만 출신이다. 당연히 아주 긍정적인 첫 미팅으로 마무리 되었고, 스티브 첸은 러브레터까지 야후에 보냈다.
다음 날 스티브 첸은 구글의 CEO 에릭 슈미트를 만났다. 그리고는 유튜브를 구글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스티브 첸은 구글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표현했다.

야후와 구글이 유튜브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차이가 있었는데, 비즈니스맨의 전형인 야후의 CEO 테리 시멜은 유튜브를 15억 달러에 인수하고 언제쯤 수익이 날지 궁금해했다면, 구글의 에릭 슈미트는 돈보다 유튜브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고, 인수 후에도 독립적으로 운영하겠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게 구글을 만난지 5일 만에 16억 5천만 달러에 계약이 체결됐다.

 


6) 애물단지 유튜브
전 세계 이용자들의 일일 업로드 동영상의 양은 엄청났다. 이를 유지하기 위한 네트워크와 서버 인프라 비용에 비해 초기 유튜브 수익 구조는 변변치 않았다.
2009년까지 매년 4억 5천만 달러 (약 5천억원)씩 적자 상태를 유지하며, 구글의 계륵 내지는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다만 구글 CEO 에릭 슈미트는, ‘유튜브는 곧 위대한 광고 전략을 선보일 것이다’라고 큰소리를 쳤다.
2008년 유튜브를 통해 광고주들이 직접 광고를 제작하여 올리는 ‘브랜드 콘텐츠’ 시스템을 도입했다. 2년 후인 2010년부터 흑자로 돌아섰고, 지금은 구글 전체를 먹여 살리는 알짜배기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7) 최초의 10억뷰 동영상
2012년 12월 22일 사상 최초 10억 뷰를 달성하며 새로운 역사를 쓴 싸이의 강남스타일, 이 영상은 2년 뒤 최초로 20억 뷰를 달성하게 된다.

2017년 8월에 최초 30억 뷰를 돌파한 영상, 루이스 폰시의 데스파시토는 바로 2개월 후 최초의 40억 뷰, 2018년 4월 5일 최초 50억 뷰까지 갈아치웠다.
<돌디> <세상의 모든지식>을 참고

평범한 맨투맨 티셔츠에 이 로고 하나가 붙으면, 가격이 100만원 이상으로 뛴다.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미친 브랜드, ‘슈프림’이다.

전 세계는 왜 이 브랜드에 열광할까?

먼저 슈프림을 말하려면 이 남자, ‘제임스 제비아’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63년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1살 때 영국으로 건너가 19살까지 유년시절을 영국에서 보낸 영국인이다. 그는 10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돈이 없어 배터리 공장에 취직해 일하는 등, 꽤 터프한 10대 생활을 보냈다.


20살이 되던 1983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오는데, 그는 뉴욕에 오자마자 소호에 있는 스케이트 샵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기 시작한다. 그렇게 돈을 모아 6년뒤 뉴욕에 자신의 편집샵을 오픈했다. 이때 샵을 열면서 한 남자의 눈에 띄게 되는데, 바로 ‘숀 스투시’이다.




숀 스투시는 브랜드 스투시를 만든 스케이트 업계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숀이 제비아에게 같이 스투시를 만들자고 제안하면서 제비아는 스투시의 창립멤버가 된다.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90년대 스투시의 인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당연히 창립멤버들은 꽤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성공에 취한 스투시는 처음에 보였던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나가지 못하고, 옷에 로고만 찍어 판매하는 안일한 방식을 택했다.

이에 실망한 제비아는 스투시를 떠나며 1994년 12,000달러를 들여 맨하탄에 슈프림을 오픈했다. 이때 그의 나이 31살이었다.


슈프림은 제비아가 지난 11년간 뉴욕에서 쌓은 스케이트 보드 업계의 모든 노하우를 발휘한 브랜드였다. 그 1호 매장은 보드를 타고 안으로 들어와 중앙에까지 보드를 탈 수 있게 설계해서, 보더들에게 가장 힙한 장소로 자리잡았다. 이후 슈프림은 25년간 쉼 없는 인기행진을 누리게 된다.


슈프림이 나온 후 지금까지 큰 인기를 누리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당시 젊은 층이 가지고 있던 시대에 맞서는 반항정신은 슈프림의 컨셉과 맞아떨어졌다.

실제로 슈프림은 뉴욕에서 악명 높은 보더, 래퍼, 힙스터의 악동들을 직원으로 채용하고, 그들을 크루로 대하고 지원했다. 이후 슈프림 크루들이 잘 나가게 되면서, 슈프림은 성공적으로 추종자들을 만들며, 더욱 핫한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또 당시 가장 잘 나가던 캘빈 클라인 속옷 광고에 자신들의 스티커를 붙이는 등 각종 화제를 낳는 행동을 벌이게 된다. 당시에는 이런 행동으로 캘빈 클라인에게 고소까지 당했지만, 이후에는 놀랍게도 당시 캘빈 클라인 모델이었던 케이트 모스와 협업을 하면서, 그들이 뉴욕 거리에 붙이고 다녔던 바로 그 모습을 티셔츠로 프린트해서 정식 발매까지 했다.



둘째, 제비아는 모든 슈프림의 제품을 출시 날짜를 정해놓고 한정판으로 출시하는 전략을 펼쳤다.

수요가 많아 훨씬 더 많이 판매할 수 있어도,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슈프림에는 리오더라는 개념이 거의 없다. 그래서 슈프림의 팬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제품을 구하기 위해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슈프림 제품이 판매되는 날을 Drop Day라고 하는데, 뉴욕을 기준으로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에 신제품을 출시한다. 그러니 매주 수요일 밤부터 그 새로운 ‘드랍’을 구하려고 거리에서 전쟁이 벌어진다.

특히 화제가 되는 상품이 발매될 때는, NYPD가 출동해 아예 발매를 못하게 하는 일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셋째, 상상 이상의 콜라보레이션.

슈프림은 전 세계 패션 관계자들에게 콜라보는 이렇게 해야한다는 것을 알려준 교과서 같은 브랜드이다. 지금은 상상치도 못하는 브랜드들의 콜라보가 흔하지만, 슈프림 이전에는 그렇게 파격적인 콜라보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1996년 반스와의 콜라보를 시작으로, 나이키, 에어조던, 노스페이스, Comme Des Garcon, 리모와 등의 브랜드들은 물론이고 키스 헤링, 제프쿤스, 리차드 프린스, 플레이 보이 등 다양한 아티스트와 매체들과도 협업 했다.


그 중 압권은 뭐니뭐니해도 2017년에 있었던 루이비통과의 콜라보였는데, 실제 슈프림은 2000년도 루이비통의 로고를 자신들의 스케이트보드에 무단으로 찍어내 루이비통에게 고소를 당한 전력도 있었다.

하지만 17년 후 슈프림과 루이비통의 콜라보는 그 해 패션계에서 있었던 가장 큰 뉴스로, 발매일 일주일 전부터 캠핑을 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다.


끝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그들의 상상력이다.

‘스케이트 보드 브랜드가 뭘 이런 것까지 만들어?’라고 생각될 정도로 특이한 물건을 많이 만드는데, 스탬프, 절단기, 도끼, 소화기, 목장갑, 벽돌까지, 놀라운 건 이 모든 제품들이 현재는 매진되어 프리미엄까지 붙어 팔린다는 사실이다.


소화기는 발매되자마자 1분만에 완판되었고, 50달러 정도에 판매된 슈프림 벽돌은 현재 이베이에서 800달러 가까이에 팔리고 있다.

2018년 8월에는 종이신문인 뉴욕 포스트 첫 면에 슈프림 로고만을 인쇄한 콜라보 신문이 발매되었는데, 이 신문은 모든 인쇄본이 바로 매진되면서 프리미엄이 붙어 팔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슈프림은 이렇게 돈을 쫓지 않지만 돈이 알아서 따라오는 가장 쿨한 브랜드가 되었는데, 이런 인기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 세계에 11개 매장만 운영하고 있고, 그 매장을 방문해본 사람들은 드랍데이가 아니면 매장에서 구경할 옷도 거의 없고 직원들의 불친절함에 고개를 젓기까지 한다.


하지만 슈프림은 최근 사모펀드 기업 ‘칼라일 The Carlyle Group’에 지분 50%를 5,500억원에 매각하면서 엄청난 돈을 벌었는데, 항간에서는 최대의 이윤을 추구하는 칼라일 사모펀드에 지분을 넘기면서 슈프림의 고유한 쿨함이 없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칼라일 그룹은 지분 매입 몇 년 후 프리미엄을 얹어서 되파는 것으로 유명한데, 일각에서는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의 LVMH(루이비통&헤네시)에서 이 지분을 다시 사들일 가능성이 유력하다고 한다.

이미 오프화이트 Off White의 수장 버질 아블로를 들이면서 LVMH는 스트릿 패션의 힘을 느끼고 있다.


앞으로 슈프림의 행방은 어떻게 될까? 추억의 브랜드? 아니면 정통 클래식?


<Money Swagger>를 참고




좋아하는 일을 지키는 건 어렵다.

특히 당신이 리더라면 또는, 언젠가 리더가 될 당신이라면...


육상선수 출신으로 달리기를 좋아하던 이 남자는 달리기를 도와주는 신발을 수입해 팔기 시작한다. 직원들 역시 대부분 육상선수 출신이어서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했고, 신발 파는 일을 좋아했기 때문에 초반에 사업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신발이 잘 팔릴수록 그 남자와 직원들의 삶은 고달파졌다. 사장이자 리더였던 그는 신발 수입을 위해 무리하게 무역금융을 써야 했고, 직원들은 그들대로 남의 제품을 언제까지 팔 수 있을지 스스로 질문하며, 위태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리더는 한 가지 결심을 하고 직원들 앞에서 이야기한다.

"우리는 더 이상 다른 기업 브랜드를 판매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 자신만의 방식과 아이디어, 브랜드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포기를 뛰어넘는 도전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 결정이 지금의 '나이키'를 만들었다. 그는 나이키의 창립자 Phil Knight였다.


지금 내가 팀장이든, 팀원이든, 인턴이든 여부는 중요치 않다. 어떤 위치에 있던 가장 중요한 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이다. 그게 결국 '이기는 힘'이다.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 내 심장이 뛰는 열정의 대화를 따라 일을 선택하는 것. 힘들어도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명확하다. 그래야 치열함 속에서도 재미를 찾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미래에 내가 리더가 되었을 때 조직과 일하는 직원에게도 그런 생생한 삶을 선물할 수 있다.



책 <혼 창 통 2: 결국 이기는 힘>의 저자는, 무자비한 열정, 1%의 소수만이 가진 성공의 기질보다는, 나이키의 창립자 필 나이트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잘 해내기 위해 노력하고, 직원들과 함께 성장하는 리더가 된 우리 시대의 영웅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 리더십의 새로운 이야기를 쓰고 있는 나영석 PD의 이야기는 더 흥미롭게 읽힌다.

그는 2017년부터 모든 프로그램을 후배 PD 들과 공동 제작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신혼일기> <윤식당> <알쓸신잡> 등이 그런 경우다.


그는 후배들과 협업을 하면 '나'라는 틀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좋은 작가와 좋은 PD를 키우는 일이 결국에는 자신의 성공률을 높이는 일이라고 말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눈빛이 다르다. 그리고 그런 탁월한 인재를 영입하는 일은 결국 리더와 조직에도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제일기획 부사장에서 서점 주인이 된, 카피라이터 최인아의 생각법에 대해서도 다룬다. 직장에서 부사장으로, 부사장을 벗어나 작은 서점을 운영하기까지 제3자가 보기에는 상관관계를 찾기 어렵다.


그녀는 서점을 단순히 책 파는 곳이 아닌, '생각을 담는 그릇, 새로운 생각의 씨앗이 발화하는 공간'이라는 자신만의 언어로 정의하며 생명을 불어넣었다.


큰 조직 속에서 글을 쓰고 직원을 관리하는 일이나, 작은 공간에서 책을 판매하는 것 모두 '창의적인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그녀에게는 같은 일인 것이다. 작은 서점이 창의적인 공간으로 명명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더 이상 소속이나 위치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가변적이며 함께 일하는 사람에 의해 좌우될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 그 일을 꾸준히 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하는 것이 '결국 이기는 힘'이다.


<혼 창 통 2: 결국 이기는 힘>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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