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맨투맨 티셔츠에 이 로고 하나가 붙으면, 가격이 100만원 이상으로 뛴다.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미친 브랜드, ‘슈프림’이다.

전 세계는 왜 이 브랜드에 열광할까?

먼저 슈프림을 말하려면 이 남자, ‘제임스 제비아’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63년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1살 때 영국으로 건너가 19살까지 유년시절을 영국에서 보낸 영국인이다. 그는 10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돈이 없어 배터리 공장에 취직해 일하는 등, 꽤 터프한 10대 생활을 보냈다.


20살이 되던 1983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오는데, 그는 뉴욕에 오자마자 소호에 있는 스케이트 샵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기 시작한다. 그렇게 돈을 모아 6년뒤 뉴욕에 자신의 편집샵을 오픈했다. 이때 샵을 열면서 한 남자의 눈에 띄게 되는데, 바로 ‘숀 스투시’이다.




숀 스투시는 브랜드 스투시를 만든 스케이트 업계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숀이 제비아에게 같이 스투시를 만들자고 제안하면서 제비아는 스투시의 창립멤버가 된다.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90년대 스투시의 인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당연히 창립멤버들은 꽤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성공에 취한 스투시는 처음에 보였던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나가지 못하고, 옷에 로고만 찍어 판매하는 안일한 방식을 택했다.

이에 실망한 제비아는 스투시를 떠나며 1994년 12,000달러를 들여 맨하탄에 슈프림을 오픈했다. 이때 그의 나이 31살이었다.


슈프림은 제비아가 지난 11년간 뉴욕에서 쌓은 스케이트 보드 업계의 모든 노하우를 발휘한 브랜드였다. 그 1호 매장은 보드를 타고 안으로 들어와 중앙에까지 보드를 탈 수 있게 설계해서, 보더들에게 가장 힙한 장소로 자리잡았다. 이후 슈프림은 25년간 쉼 없는 인기행진을 누리게 된다.


슈프림이 나온 후 지금까지 큰 인기를 누리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당시 젊은 층이 가지고 있던 시대에 맞서는 반항정신은 슈프림의 컨셉과 맞아떨어졌다.

실제로 슈프림은 뉴욕에서 악명 높은 보더, 래퍼, 힙스터의 악동들을 직원으로 채용하고, 그들을 크루로 대하고 지원했다. 이후 슈프림 크루들이 잘 나가게 되면서, 슈프림은 성공적으로 추종자들을 만들며, 더욱 핫한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또 당시 가장 잘 나가던 캘빈 클라인 속옷 광고에 자신들의 스티커를 붙이는 등 각종 화제를 낳는 행동을 벌이게 된다. 당시에는 이런 행동으로 캘빈 클라인에게 고소까지 당했지만, 이후에는 놀랍게도 당시 캘빈 클라인 모델이었던 케이트 모스와 협업을 하면서, 그들이 뉴욕 거리에 붙이고 다녔던 바로 그 모습을 티셔츠로 프린트해서 정식 발매까지 했다.



둘째, 제비아는 모든 슈프림의 제품을 출시 날짜를 정해놓고 한정판으로 출시하는 전략을 펼쳤다.

수요가 많아 훨씬 더 많이 판매할 수 있어도,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슈프림에는 리오더라는 개념이 거의 없다. 그래서 슈프림의 팬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제품을 구하기 위해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슈프림 제품이 판매되는 날을 Drop Day라고 하는데, 뉴욕을 기준으로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에 신제품을 출시한다. 그러니 매주 수요일 밤부터 그 새로운 ‘드랍’을 구하려고 거리에서 전쟁이 벌어진다.

특히 화제가 되는 상품이 발매될 때는, NYPD가 출동해 아예 발매를 못하게 하는 일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셋째, 상상 이상의 콜라보레이션.

슈프림은 전 세계 패션 관계자들에게 콜라보는 이렇게 해야한다는 것을 알려준 교과서 같은 브랜드이다. 지금은 상상치도 못하는 브랜드들의 콜라보가 흔하지만, 슈프림 이전에는 그렇게 파격적인 콜라보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1996년 반스와의 콜라보를 시작으로, 나이키, 에어조던, 노스페이스, Comme Des Garcon, 리모와 등의 브랜드들은 물론이고 키스 헤링, 제프쿤스, 리차드 프린스, 플레이 보이 등 다양한 아티스트와 매체들과도 협업 했다.


그 중 압권은 뭐니뭐니해도 2017년에 있었던 루이비통과의 콜라보였는데, 실제 슈프림은 2000년도 루이비통의 로고를 자신들의 스케이트보드에 무단으로 찍어내 루이비통에게 고소를 당한 전력도 있었다.

하지만 17년 후 슈프림과 루이비통의 콜라보는 그 해 패션계에서 있었던 가장 큰 뉴스로, 발매일 일주일 전부터 캠핑을 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다.


끝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그들의 상상력이다.

‘스케이트 보드 브랜드가 뭘 이런 것까지 만들어?’라고 생각될 정도로 특이한 물건을 많이 만드는데, 스탬프, 절단기, 도끼, 소화기, 목장갑, 벽돌까지, 놀라운 건 이 모든 제품들이 현재는 매진되어 프리미엄까지 붙어 팔린다는 사실이다.


소화기는 발매되자마자 1분만에 완판되었고, 50달러 정도에 판매된 슈프림 벽돌은 현재 이베이에서 800달러 가까이에 팔리고 있다.

2018년 8월에는 종이신문인 뉴욕 포스트 첫 면에 슈프림 로고만을 인쇄한 콜라보 신문이 발매되었는데, 이 신문은 모든 인쇄본이 바로 매진되면서 프리미엄이 붙어 팔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슈프림은 이렇게 돈을 쫓지 않지만 돈이 알아서 따라오는 가장 쿨한 브랜드가 되었는데, 이런 인기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 세계에 11개 매장만 운영하고 있고, 그 매장을 방문해본 사람들은 드랍데이가 아니면 매장에서 구경할 옷도 거의 없고 직원들의 불친절함에 고개를 젓기까지 한다.


하지만 슈프림은 최근 사모펀드 기업 ‘칼라일 The Carlyle Group’에 지분 50%를 5,500억원에 매각하면서 엄청난 돈을 벌었는데, 항간에서는 최대의 이윤을 추구하는 칼라일 사모펀드에 지분을 넘기면서 슈프림의 고유한 쿨함이 없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칼라일 그룹은 지분 매입 몇 년 후 프리미엄을 얹어서 되파는 것으로 유명한데, 일각에서는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의 LVMH(루이비통&헤네시)에서 이 지분을 다시 사들일 가능성이 유력하다고 한다.

이미 오프화이트 Off White의 수장 버질 아블로를 들이면서 LVMH는 스트릿 패션의 힘을 느끼고 있다.


앞으로 슈프림의 행방은 어떻게 될까? 추억의 브랜드? 아니면 정통 클래식?


<Money Swagger>를 참고




포브스 2018년 순위 발표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브랜드 가치가 가장 높은 기업은 애플이었다.

그러면 전 세계 모든 패션 브랜드 중에서 가치가 제일 높은 기업은 어디일까?

그 1위는 ‘루이비통 LOUIS VUITTON’이다.

매년 나이키와 1,2위 자리를 놓고 다투지만, 이번 왕관은 루이비통이 차지했다.


루이비통은 단순히 하나의 브랜드가 아닌 세계 최대의 패션&주류 그룹인 Louis Vuitton & Moet Hennessy, 줄여서 LVMH이다.


주류를 제외하고 패션 쪽만 보더라도 패션 제국이라는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데, LVMH안에 속한 루이비통 이외의 패션 관련 브랜드만해도 디올, 펜디, 지방시, 켄조, 마크제이콥스, 셀린느, 로로피아나, 리모와 등이 있고, 거기에 불가리, 위블로, 태그호이어, 제니스 등의 시계 브랜드, 겔랑, 메이크업포에버, 프레쉬, 베네피트같은 코스메틱, 그리고 세포라, 르 봉마르쉐 백화점, DFS면세점 같은 유통망까지 보유하고 있어 그야말로 패션하우스의 어벤져스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제국을 가진 루이비통도 처음에는 포장가게부터 시작했다는데, 그들은 어떻게 이런 패션 제국을 만들었는지 기록을 뒤져 정리해보자.



창립자는 루이비통 Louis Vuitton이다.

1821년 프랑스 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14살에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집을 나왔는데, 어린 나이에도 그가 첫 목표로 삼은 도시는 파리였다. 당시엔 비행기나 기차는 커녕 자동차도 없던 시절이었다.

온갖 허드렛일로 입에 풀칠을 하며 대도시를 향해 조금씩 이동하면서, 2년만에 파리에 도착했다고 한다.


파리에 도착하면서부터 그는 상류층이 이용할만한 여행용 고급가방을 만들어야겠다는 꿈을 가진다. 실제로 이때는 여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곧 상류층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귀족이 아닌 일반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며 자신이 살던 도시 외에는, 평생 동안 다른 곳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루이비통은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파리에서 가장 유명했던 가방 장인을 찾아갔고, 그의 제자로 들어가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배우며 그가 한 일은 귀족들의 짐을 싸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루이비통의 짐 싸는 방법은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디테일이 남들과는 달라, 귀족들 사이에서 최고의 포장 전문가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나폴레옹 3세의 황후인 외제니의 전담 패커가 되었다.


1854년 루이비통은 그간의 노력을 마침내 보상받게 된다. 외제니 황후의 후원으로 자신의 매장을 열었는데, 그가 파리에 온지 17년만의 일이었다.

루이비통의 이름을 걸고 낸 매장은 포장전문 가게였다. 이미 귀족들 사이에서는 최고로 포지셔닝 되었고, 거기에다 황후의 전속 패커라는 이력이 이미 붙어 있었다.


그의 포장가게는 말 그대로 번창하며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고, 그 당시 프랑스의 경제적 호황과 맞물려 대박이 났다. 돈 버는 사람은 물론이고 당시 휴양지로 여행을 가는 사람도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한다.

그 당시 제작됐던 여행용 트렁크들은 목재로 만든, 무겁고 관처럼 생겨 쌓기가 매우 어려운 모양이었다.




루이비통은 파리에 온 후 20년이 넘는 동안 꿈꾸었던 여행용 트렁크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제작된 트렁크는 캔버스를 사용해 가볍고 전체가 각진 사각형 모양으로 여러 개를 적재하기도 편했다.

또한 프랑스 상류층들이 좋아할만한 고급스러운 디자인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가 트렁크를 발매하자마자 후원자였던 황후는 물론이고, 사회 저명 인사들이 루이비통 트렁크를 구입하면서 발매 초기부터 대단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는 디자인이나 상표 등의 지적재산권이라는 개념이 없거나 모호하던 시절이었다. 루이비통이 만든 트렁크가 인기를 끌자, 많은 공방들이 비슷한 스타일의 모조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루이비통과 그의 아들 조르주 비통은 모조품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고, 다른 모조품과 차이점을 한눈에 알려주려는 목적으로 그들은 역사적인 ‘다미에 Damier 문양’을 개발했다.

바둑판 모양의 격자 무늬 안에 자신들의 로고를 새긴 다미에는, 많은 패션하우스들이 자신의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차별화하는 문양의 시초가 되었다.


루이비통이 사망하고 아들인 조르주 비통이 경영권을 물려받으면서, 그는 루이비통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먼저 그는 현재의 루이비통의 상징인 모노그램을 창안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루이비통의 가장 상징적인 문양이 되어있는데, 지적재산권이 애매한 바둑판 무늬에서 아예 LV를 교차하여 사용한 모노그램은, 다른 브랜드가 따라 할 수 없는 독창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더구나 트렁크에만 한정되었던 라인을 다양한 가방을 만들면서 확장해나갔는데, 지금의 대표적인 키폴백이나 스피디백 등은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특히 스피디백은 길거리에서 3초에 한번은 볼 수 있는 가방이라 하여 3초백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1900년대 후반까지 루이비통은 대를 이어가며 계속 가족경영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1987년 루이비통은 당시 모에샹동&헤네시 그룹과 더 큰 기회를 잡기 위해 합병을 하게 된다. 이때의 합병으로 현재 LVMH 회장이자 유럽에서 가장 돈이 많은 베르나르 아르노가 등장하는데, 아르노는 자신이 가진 돈을 LVMH에 몰빵하면서 1인자가 되었고, 루이비통 가족들은 서서히 경영권을 잃어갔다.


합병 10년 후 루이비통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를 수석디자이너로 합류시키면서, 클래식 스타일과 트렌드를 함께 잡는 브랜드로 성장한다.

루이비통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이끄는 이유로 마크 제이콥스의 힘을 무시할 수 없는데, 그는 1997년부터 2014년까지 루이비통을 이끌면서 세상에서 가장 잘 팔리는 브랜드로 만들었다.


루이비통은 현재 쟁쟁한 브랜드가 모인 LVMH 안에서도 한 해 10조원이 넘는 매출을 올려 전체 매출의 3분의 1 가량을 차지하며, 최근에는 오프화이트의 버질 아블로 Virgil Abloh 같은 신선한 인물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앞세우면서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앞으로도 루이비통은 계속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최강자로 군림할 수 있을까? 아니면 새로운 강자가 그들의 자리를 대체할까?


<아보카도> <Money Swagger>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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